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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eniru's Presenter file [1]
Adam Yamaguchi - current TV  / Vanguard



Adam Yamaguchi (Los Angeles, California) is an Asian-American television correspondent and producer at Current TV, a cable network founded by former US Vice President Al Gore. He earned economics and communications degrees at UCLA, where he served as editor-in-chief of the Daily Bruin newspaper. He then worked at Fox Sports, CNN and TV Asahi Japan, also freelancing for a number of agencies, where he traveled the world in pursuit of stories. He has covered the Space Shuttle Columbia disaster, the 2000 presidential election and subsequent debacle, and the September 11 attacks. He has also focused abroad to the wars in Afghanistan and Iraq, indigenous cultures deep in the Amazon, Argentina’s economic collapse, the Inuit whale hunt, Japanese suicide, Korean defectors, Global Warming, AIDS in Cuba, free press in the Middle East, and the HIV/AIDS epidemic in India. While producing a series of reports on global warming and other environmental issues, he recently traveled to Colombia and Bolivia to produce a series on coca cultivation and changing attitudes toward U.S. policy in the region. A recent edition of the series Vanguard included an in-depth look at the Northern Mariana Islands and Saipan with the collapse of its largest industry, the manufacturing of clothing. Another Vanguard documentary featured a look at Japan's impending population collapse. In the Vanguard series, he also examines glacier melt in Greenland.

Adam Yamaguchi is executive producer and correspondent for Current TV’s no limits documentary series “Vanguard.” While with Current TV, Yamaguchi has reported on some of the most important issues affecting the world today, with investigations that have taken him around the world. Yamaguchi’s reports include the rise of robotics in Japan, the decline of a manufacturing empire in Saipan, the incredible rise of modern China and Pakistan’s ongoing attempts to deal with terrorists in the nation’s lawless border regions. Yamaguchi has reported extensively on the environment, from atop Alaska’s glaciers, to Bangladesh, China, Madagascar and in Greenland.

Prior to his work with “Vanguard,” Yamaguchi worked at Fox Sports, CNN and TV Asahi Japan, where he covered major national and international news including the 2000 Presidential election, the September 11th attacks and the war in Iraq. Yamaguchi began his journalism career at the University of California, Los Angeles, where he served as the editor-in-chief of “The Daily Bruin.”


http://www.facebook.com/people/Adam-Yamaguchi/7539744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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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_mipdoc  Most Screened Categories

Category Screenings

Current Affair 4289

History and Civilization 3663

Art / Music / Culture 2564

Science and Knowledge 2494

Adventure and Travel 2433

Lifestyle / Entertainment 2378

Nature, Wildlife 1881

Social Responsability / Green 1503

Ethnology, Sociology 1404

Docu-Drama 1400

Feature Film 676

Educational / Youth oriented 254

Webdoc 146

Total 250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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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eeniru

2010년 트렌드 키워드

2010 트렌드 키워드
카테고리 경제/경영
지은이 김민주 (미래의창, 2009년)
상세보기


<Economy>

5퍼센트 룰

갸루산업

공정무역

그레이 캐피털리즘

기분호전 효과

기업형 슈퍼마켓

내부기업가

더블딥

도시광산업

립스틱 효과

마이스 산업

매도프 사기사건

매스티지

메나

미디어렙

미소금융

버핏효과

보금자리주택

블랙 컨슈머

사모펀드

사이드카

수면경제

슈퍼노트

스토리슈머

스트레스 테스트

신국가자본주의

아트 마케팅

어닝 쇼크

에고노믹스

역모기지론

영리병원

예산불용액

오아시스 오브 더 시즈

이마트지수

이코노사이드

이타카 아워즈

잠재수요

잡셰어링

죄악주

차스닥

출구전략

치킨게임

카계부

콜래보노믹스

투자은행

트윈슈머

티커머스

팝업 스토어

퍼케이션

편집매장

프리코노믹스

플래그십 스토어

플랫폼 컴퍼니

해피아워

핸드백 효과

DTI

 

<Society>

4대강 사업

6자회담

관타나모 수용소

그린워싱

긍정심리학

기후난민

김신조 루트

나방효과

나일론

넛지

다둥이 가족

다문화

닭둘기

대체공휴일

도시농부

라이프스타일 드러그

로스쿨

로하스

메러비안의 법칙

바우처

반려동물등록제

백신주권

보케베케

사이버망명

상콩

선군사상

선플

수상호텔

수월성교육

슈퍼클래스

스마일 우울증

신상털기

신장위구르

실버티즌 증후군

아담증후군

아프팍

압솔리지

언프렌드

에어로트로폴리스

에코뷰티

에코시크

에코테러

여수엑스포

웨트웨어

이혼숙려제

인천대교

입학사정관

전산휴가

정신비만

존엄사

차이완

책임여행론자

취업 5종 세트

컨시어즈 서비스

코벌라이제이션

코펜하겐 기후변화협약

클리코크라시

타운홀미팅

탄소배출권 거래제

탄소중립국

플리바게닝

하인리히 법칙

학파라치

혼인빙자간음죄

힝글리시

C9

CCL

G20

 

<Culture>

갈라쇼

고샅길

골프텔

그린 노마드

다크 투어리즘

독립영화

떡볶이

마이크로트렌드

막걸리

막장 드라마

매니쉬룩

매키스

메세나

몰링

무비컬

미니벨로

바이두

베지터블 가죽

복지관광

블룩

블링블링

빈티지

뽐뿌질

산자이문화

상조업

서울스퀘어

서페라

세계유산

수목장

슈퍼스타 K

슈퍼푸드

스몰토크

스크린셀러

슬로비

시스루룩

실버코믹스

어장관리

에코 럭셔리

에코 투어리즘

엣지

오마주

올레

유니버설 디자인

의료관광

자쿠미

집단지성

찌아찌아어

청담동 며느리룩

킬힐

텔레노벨라

패스트패션

팩션

페차쿠차

프라모델

프로튜어

프리퀼

하우스콘서트

하이컨셉

해치택시

후크송

흰 코끼리

 

꼬리에 꼬리를 무는 키워드 아이돌그룹

 

<People>

개스트로섹슈얼

건어물녀

골드미스터

공옥진

그루밍족

나이트쿠스족

노무족

니트족

다운시프트족

데스크테리어족

도시락남자

딩펫족

레드아이족

루비족

매니저 어머니

미스맘

미실

바링하우

블로터

블맹

사이코패스

스포테이너

신지애

알파대디

애니멀 커뮤니케이터

양용은

어라포

엠니스

오은선

오팔족

오피스 와이프

와이프로거

완판녀

욘족

우사인 볼트

우엉남

웹버족

웹시족

인상녀

잇걸

자출족

젯셋족

짐승남

철벽녀

초식남

추추트레인

코스모크래츠

코피스족

콘트라리더

쿠거족

큐비클맨

크런치세대

클라시쿠스

키보드 워리어

토이남

통크족

트로피 와이프

패러싱글족

품절남

품절녀

프라브족

프로파일러

플리퍼족

피겨맘

하토야마 유키오

헝그리 어답터

헤르만 반 롬파위

헬리콥터맘

호모 나랜스

호모 콘수무스

A세대

 

<Science>

2012년 종말설

3스크린

4G

거대과학

구석기 다이어트

그리드 패리티

나로호

넷북

넷탑

농광학

누브

루미덕트

링스헬리콥터

마이크로블로그

마이크로사이트

맞춤유전의학

매쉬업

매크로바이오틱

바이오 플라스틱

바이오매스

바이오인식기술

보코드

볼라드

분자요리

블루레이

수리온

스너피

스마트 그리드

스마트 더스트

스마트몹

스마트북

슬로 메디신

아몰레드

안드로이드

앱스토어

여유증

와이브로

위젯

이동식 부두

이안류

자연모사공학

좀비PC

증강현실

창발성

클라우드 컴퓨팅

클리어 쾀

킨들

트위터

판데믹

팔린드롬

패시브 하우스

풀브라우징

하이브리드카

희토류

GTX

IP-TV

NBIC

RFID

US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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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eeniru
Production period : Sept. 2007 ~ Nov. 2010
For HD documentary 60 min. x 1 episode

출처 :  www.garycam.com


A blueprint of GwangHwaMun, the main gate of GyeongBok palace which Japanese drew before they dismantle and moved the gate to the east of the Palace.


The document to be installed in cross beam. A brief history of GwangHwaMun(Main gate of GyeongBok Palace) and the list of major participants in restoration are stated.



Cross Beam Ceremony at GwangHwaMun Restoration Site. In Korean traditional architect, they take a very import day when they install a cross beam and hold a big ceremony.


GwangHwaMun Restoration site



Korea Red Pine. This is 110 years old one which is about 1m in diameter & 30m in height. The timber will be dried for more than a year and will be used for restoration of Gwanghwamun, the main gate of Gyeobgbok Palace.


Document box to be installed to cross beam.


Howard with a BIG thing. Sony F900R and Canon 500mm Zoom Le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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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eeniru
 

THE ASCENT OF MONEY  / 돈의 힘

RISKY BUSINESS / 4부 위험한 거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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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15

재테크의 기본은 미래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위험에 대비하는 것입니다. 최근에 금융위기를 겪었던 우리에게는 다가올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큽니다. 세상 곳곳에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죠.


살다보면 우구나 한번쯤은 불행을 겪기도 합니다. 불의에 재난을 당하기도 하죠. 2005년 미국 뉴올리언스를 강타한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바로 그러한 경우입니다. 문제는 불확실한 미래를 어떻게 대비하느냐는 것입니다. 개인의 문제이니까 스스로 해결하는 것이 정답일가요? 아니면 국민들이 보내온 성금이나 구호물자에 의존하는 편이 좋을까요? 그것도 아니면 정부가 재난에 대비해서 납세의무자들로부터 세금을 거둘 때까지 기다려야 할까요?


질문은 길었지만 답은 간단합니다. 바로 보험(재해나 사고에 대비해 일정한 돈을 적립하고 사고를 당했을 때 일정 금액을 보상받는 견제제도)입니다.


보험하면 영국을 빼 놓을 수 없죠. 다른 나라에 비교하면 영국인들은 보험료를 많이 내는 편입니다.  안전한 나라 영국에 살면서 왜 보험에 의지 하냐구요? 먼저 돈과 위험관리는 불과분에 관계라는 것을 염두 해 두고 성직자가 고안한 생명보험에서부터 복지국가의 흥망, 헷지펀드의 성장과 억만장자의 출현을 검토해 보죠.  위험관리란 끝이 없는 싸움과 같습니다. 삶이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세상이 예측가능하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미래는 전혀 예측할 수 없어서 종종 곤경에 빠집니다.


우리는 예측 가능한 위험을 기대하지만 현실은 예측이 불가능합니다.


THE ASCENT OF MONEY  / 돈의 힘

RISKY BUSINESS / 4부 위험한 거래


미국 뉴올리언스


00:02:47

2005년 8월 뉴올리언스를 강타한 허리케인 “카트리나”는 엄청난 피해를 입혔습니다. 현재 미국 뉴올리언스는 또 다른 위험에 직면 해 있습니다. 재난을 극복하려면 돈이 필요합니다. 위험관리 목적으로 보험을 들었는데 막상 보장을 받지 못한다면 무용지물이나 다름없겠죠.


허리케인이 뉴올리언스 한 복판을 강타하지는 않았습니다. 북동쪽으로 살짝 비켜갔죠. 하지만 주민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을 때 재난은 시작됐습니다.


여기는 폰차트레인 호수와 미시시피강을 연결하는 수로가 있던 곳입니다. 폭우를 동반한 허리케인 때문에 수위가 높아졌고 제방은 수압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졌죠. 뉴올리언스 제 9지역은 결국 물에 잠기고 말았습니다.


9지역 동쪽에 있는 세인트버나드엔 주택을 소유한 노동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이 가입한 보험약관에는 보상조건이 명시되어 있었죠.


당시 지방의회 의원이었던 디파타는 대피명령에 따르지 않고 시청에 남았습니다. 하지만 물이 계속 차오르자 건물 옥상으로 피할 수 밖에 없었죠.


디파타

“보시다시피 당시 물이 여기까지 차올랐습니다.”

“물이 계속 올라 왔죠.”

“건물 안으로 물이 밀려오더니 15분 만에 수위는 4M를 넘어섰습니다.” 

“건물 2층에서 밖을 내려다 봤는데 도로는 물에 완전히 잠겼고 지붕은 부서진대다 차들은 둥둥 떠다니고 있었습니다. 수위가 굉장히 높았죠. 적어도 5~6M는 됐을 겁니다.”


니알퍼거슨

“물살도 급했죠?”


디파타

“네 물이 이쪽 도로를 휩쓸고 지나며 모든 걸 집어 삼켜 버렸습니다.”


세인트 버나드 전 지역이 침수되는데 걸린 시간은 15분, 주택 26,000채 중 다섯 채 만이 물에 잠기지 않았습니다. 허리케인과 홍수로 뉴올리언스 주민 2,000여명이 희생당했습니다. 세인트버나드에선 148명이 희생됐는데 이 중 상당수는 침수된 집에 갇혀서 목숨을 잃고 말았죠.


문에 적힌 표시는 집안에서 시신이 발견됐다는 뜻입니다. 흑사병이 창궐했던 중세도시를 연상시키는군요.


현재 뉴올리언스 주민들은 또 다른 문제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번엔 경제적인 문제가 숨통을 조이고 있죠. 주택에 대한 손해보험에 가입할 수 없어서 주민들이 떠나고 있습니다. 이처럼 정작 큰일을 당 했을 때 제대로 보상받지 못하는 민간보험의 구조적인 모순을 한 남자가 폭로하고 나섰습니다.


00:06:28

해군 조종사 출신인 스크러그스 변호사는 소송천국이라고 불리는 미국에서 주로 민감한 쟁점들을 문제 삼아 왔습니다. 이를테면 담배회사가 폐암경고를 소홀했다는 점을 지적하는 식이었죠. 결국 담배회사와 석면제조사는 각각 2천 4백 8십억 달러와 5천만 달러의 배상금을 지급했습니다. 수임료도 많이 받았죠. 담배소송에서만 무려 14억 달러를 벌었다고 합니다.


스크로거스는 미국 보험회사를 대상으로 여러 차례 소송을 걸었습니다. 허리케인 때문에 집이 파손된 주민 수 백 명은 보험회사가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는다면서 스크러그스에게 집단소송을 의뢰했죠.


니얼퍼거슨

“저곳에 집이 있었나요?”


스크로그스

“저 공터뿐만 아니라 트레일러가 있는 자리에도 집이 있었어요.


스크러그스도 허리케인의 피해자입니다. 미시시피 남서부에 있는 파스칼라비치의 집이 한 채 있었는데 허리케인 때문에 파손돼서 결국 헐어야 했죠.


스크로그스

“ 이 부근이 현관입니다. 흔적도 없이 전부 사라졌네요.”

 

니얼퍼거슨

“공터나 다름없군요.”


스크로그스 

“아 예 그래요!.”


니얼퍼거슨

“보험자들을 어떻게 후원하죠?”


스크로그스

“다행히 저는 경제적 여건이 돼서~~”


니얼퍼거슨

“새 집을 지울 수 있군요”


스크로그스

“주민들 대다수는 그럴 돈이 없죠.”


니얼퍼거슨

“아! 그렇군요. 가입자들이 보험금을 제대로 받으려면 현행 보험 제도를 어떻게 바꿔야 할까요? 보장내역을 확실히 할 방법이 있습니까?”


스크로그스

“방법은 있습니다. 시중에서 판매되는 약품에는 약효뿐만 아니라 부작용에 대한 경고와 복용 시 주의사항이  적혀있어서 효능과 위험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행 보험약관은 너무 어렵고 복잡한 것이 문제죠. 사람들이 쉽게 이해 할 수 있도록 약관을 수정해야 합니다.”


스크로그스는 보험사에 지속적으로 문제제기를 했습니다. 그 결과 가입자 수 백 명에게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던 미국 굴지의 보험사가 지급에 합의했죠.


00:08:50

하지만 승리의 여신은 보험사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스크로그스는 수임료분쟁에서 유리한 판결을 받기위해 판사를 매수한 혐의로 유죄가 확정돼 5년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이를 틈타 보험회사들은 허리케인소송을 무마하고자 걸프해안의 일부지역에는 보험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선언했습니다.  이 때문에 허리케인 피해가 심각했던 뉴올리언스 일부지역은 보험혜택을 받을 수 없게 되었지요.


니얼퍼거슨

“주택 융자도 받을 수 없나요?”


디파타(지방의회 전직 의원)

“예 그렇습니다. 주민들은 선택을 해야 합니다. 집을 다시 짓거나 보험료가 저렴한 지역으로 이사를 갈 수 밖에 없죠. 지역사회도 타격이 큽니다. 주민들이 마을을 떠나기 때문에 이 지역은 사실상 마비상태입니다.”


허리케인이 휩쓸고 지나간 지 3년 만에 세인트버나드의 인구는 전체인구의 3분의 1로 줄었습니다.


인생은 예기치 못한 상황의 연속입니다. 카트리나 사태가 준 교훈은 분명합니다. “보장을 받을 줄 알았는데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보험금 액수는 얼마 되지 않는데 청구절차가 복잡한 경우가 있죠. 그런데도 가입자는 꼬박꼬박 보험료를 내야 한다니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누가 이런 제도를 만든 것일까요?


00:10:35

보험의 주된 목적은 만약을 대비한 저축입니다. 허리케인 피해보험 청구소송은 좋은 교훈을 주죠. 보험금을 받으려면 약관을 꼼꼼하게 살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근대보험역시 신중하고 알뜰한 사람들이 많기로 유명한 스코틀랜드에서 출발했습니다.


스코틀랜드인들은 비관적이라고 하죠? 연일 비가 오는 궂은 날씨 때문일까요? 아니면 국제 스포츠경기에서 매번 참패해서일까요? 어쩌면 엄격한 칼뱅주의 교리에 영향을 받아서인지도 모릅니다. 교회이야기까지 나왔군요.


1744년 근대보험을 창안한 인물은 스코틀랜드 국교회의 성직자들입니다. 훗날 보험시장은 수십억 파운드의 규모로 성장을 하죠.



영국 스코틀랜드 / 그레이프라이어스 교회묘지


18세기말 그레이프라이어스 교회묘지에는 시체도둑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에든버러 의과대학의 해부용 시신으로 공급한 것으로 유명하죠. 하지만 교회는 성직자 두 명의 업적 때문에 더 유명합니다. 주인공은 로버트 월리스(생명보험을 최초로 만든 성직자)와 알렉산더 웹스터입니다.

 

보험의창시자가 스코틀랜드의 성직자였다는 것이 놀랍지는 않습니다. 스코틀랜드 교회의 성직자라고 하면 신중하고 검소하며 철저하게 금욕적인 생활을 고수하는 모습이 쉽게 연상이 되니까요. 로버트 월리스는 수학의 천재이면서도 술도 잘 마셨습니다. 친구들하고 시끌벅적하게 술 마시기를 즐겼죠.


월리스와 웹스터는 동료 성직자가 세상을 떠난 후 남겨진 유가족이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 안타까워했습니다. 고민 끝에 윌리스와 웹스터는 이들을 구제할 방법을 생각해 냈죠. 최초의 보험은 이렇게 탄생하게 됐던 것입니다.


당시 월리스의 자금내용을 기록한 문서가 스코틀랜드에 있는 국가기록문서 보관소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그 중 일분데요, 도움이 필요한 유가족이 몇 명인지 치밀하게 계산한 내용이 아주 잘 나와 있습니다.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점은 성직자들로부터 걷은 보험료를 고스란히 유가족에게 지급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보험료를 가지고 기금을 만든 후에 그 돈을 수익사업에 투자했다는 사실이 흥미롭죠. 거기서 나온 수익을 유가족에게 지급하면 보험료의 원금은 건드리지 않아도 됐으니까 말이죠.


이 제도를 효율적으로 운용하려면 미래에 발생하게 될 유가족의 수가 얼마가 될지 파악해야 됩니다. 월리스와 웹스터는 이를 놀랍도록 정확하게 계산해 냈죠.


00:14:11

스코틀랜드의 성직자 유가족을 위한 보험은 금융역사에서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했습니다. 이를 발판으로 스코틀랜드의 성직자뿐만 아니라 누구나 가입할 수 있는 보험이 등장했죠. 1815년에는 보험의 영역이 확대되어 나폴레옹전쟁에서 희생된 군인들의 유가족에게도 보험금이 지급이 되었습니다. 워털루전쟁에서는 군인 4명중 한명이 목숨을 잃었죠. 하지만 보험에 가입을 했다면 유가족은 지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군인들은 죽어서도 가족을 지킬 수 있었죠.


두 성직자가 생각해냈던 최초의 보험은 스코티시 위도우스(Scottish Widows)라는 세계적인 보험회사의 토대가 됐습니다. 그리고 채무에 시달리던 영국의 작가 월터스 콧의 일화는 무척 흥미롭죠. 그는 1826년 보험에 가입할 당시에 채권자들에게 자신이 죽으면 돈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죠.


19세기 중반에는 일요일에 교회를 가는 일만큼이나 보험가입이 일상적이 됐습니다. 1774년 두 성직자가 숫자와 씨름하는 동안 사람들은 이 제도가 거대한 보험시장으로 성장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겠죠. 하지만 월리스는 이미 250년 전에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보험가입자가 많을수록 보험계산 방식이 쉽다는 사실을 말이죠. 보험가입자 개인의 수명을 정확히 예측하기 어렵겠지만 가입집단의 평균수명은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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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eeniru
돈의 힘_3부 거품과 붕괴 (BLOWING BUBBLES) 내레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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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SCENT OF MONEY  / 돈의 힘

BLOWING BUBBLES / 3부 거품과 붕괴


제작 : chimerica Media (영국 2008 - BBC방영) 


00:00:10:00 (타임코드는 상이할 수 있습니다)

세계를  움직이는 세력은 사기업, 그중에도 다국적 기업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남아메리카의 광대한 자연을 인간의 힘으로 다스린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죠. 그런데 이것을 가능케 한 기업이 있습니다. 150억 달러를 투자해서 볼리비아에서 브라질의 동쪽해안에 이르기까지 남미대륙을 가로지르는 송유관을 건설했고 아르헨티나 남부에 있는 파타고니아에서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이르기까지 장장 650만 킬로미터에 이르는 세계최장의 송유관을 건설했습니다. 


니알 퍼거슨 / 하버드대 경제학과 교수

현대 자본주의의 거대한 야만을 드러내는 이 같은 시도는 주식회사*의 등장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 주식회사 : 주식을 발행해 여러 사람들에게 자본을 조달받는 회사로 자본과 경영이 분리되는 회사의 대표적인 형태


16세기 화폐와 시용거래부문에서 혁신이 일어났고 17세기에는 채권시장이 탄생했습니다. 다음단계는 공동소유의 기반을 둔 유한책임회사*의 출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회사에 더욱 힘을 실어준 것이 있습니다. 바로 주식시장입니다.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녀석이죠. 주식은 미래수익에 대한 사람들의 예측을 기반으로 주식시장에서 그 가격이 결정됩니다. 그런데 최근에 발생한 금융위기에서 보았듯이 주식시장은 쇼크마켓 즉 충격시장으로 돌변하기도 합니다.

* 유한책임회사 : 주주가 채권자에 대하여 출자한 지분만큼만 책임을 지는 회사형태


이렇듯 미래는 불안합니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낙관적인 성향이 있죠. 뉴욕증시의 주가가 동반상승할 때 투자자들이 도취감에 빠지는 것처럼 말이죠. 연방 준비제도이사회의 전 의장이었던 앨런 그린스펀*은 이를 두고 비이성적인 과열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과열된 주식시장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비눗방울과 같죠.

* 앨런 그린스펀 : 미국의 경제학자이자 경제 관료로 1987년부터 2006년까지 미국 연방 준비제도이사회의장을 역임함


중남미의 거대한 송유관 사업을 벌인 엔론사*를 두고 발생한 주식과열현상은 비이성적이었고 그 거품이 터졌을 때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엔론사태(미국의 에너지 회사인 엔론사가 주도한 대형회계부정사건)는 미국역사상 가장 심각한 기업사기 였습니다.

* 엔론 : 1996년부터 2001년까지 6년 연속 “미국의 가장혁신적인 회사”로 선정된 에너지회사로 2001년 회계부정 사건으로 파산신청을 함


주식거래가 이루어진 지난 400여 년 동안 엔론사태가 첫 주식사기는 아니었습니다. 이런일은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죠. 그리고 현대 금융위기의 한 원인이기도 합니다. <회계부정> <주가조작> 몇 세기동안 끊이지 않고 계속되는 일이죠. 주식시장에 거품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면 인류가 역사의 교훈을 외면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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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SCENT OF MONEY  / 돈의 힘

BLOWING BUBBLES / 3부 거품과 붕괴


이탈리아 베네치아

이곳 베네치아에는 금융역사를 통틀어 깜짝 놀랄 일화가 있습니다.

“프랑스왕실 국고의 훌륭한 관리자 에든버러 출신의 ‘존 로’ 그 업적과 삶을 기리며”


* 존 로
: 프랑스에서 활동한 영국의 재정가로 미시시피회사를 설립해 서인도회사로 발전시켰음


여기는 주식시장의 거품을 만든 주인공이 잠든 곳입니다. 존 로는 살인자에 상습적인 도박꾼이었지만 금융행위에서만큼은 천재였습니다. 자산 가치에 처음으로 거품을 일으켰으며 이 때문에 프랑스 시민혁명이 일어나게 되죠.  존 로는 한때 미국영토 4분의 1을 소유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상 최초의 주가폭락으로 그 모든 것을 잃었죠. 에든버러에서 암스테르담, 파리, 뉴올리언스를 거쳐 베네치아에 이르기까지 한 인간의 벼락출세와 파멸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미국 루이지애나 주립박물관에는 존로의 초상화가 소장되어 있습니다. 예, 여기 있군요. 깡마르고 갈망하는 표정 전형적인 스코틀랜드인의 모습니다. 미천한 신분에서 유명인으로 종국에는 파멸에 이른 <존 로>.  존 로는 1671년 영국 에든버러의 부유한 금세공장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1694년에는 한 여인을 두고 결투를 벌이다 상대를 죽여서 사형선고까지 받았습니다.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존 로는 감옥을 탈출해서 네덜란드로 도피하게 됩니다. 도피처로 암스테르담을 선택한 것은 존 로에게 행운이었죠. 1690년대 암스테르담은 세계 금융혁명의 1번지였습니다. 당시 네덜란드는 스페인과의 전쟁 때문에 국영 복권을 만들어 판매했고 위조가 쉬운 주화로부터 상인들을 보호하고자 사실상 세계최초의 중앙은행을 설립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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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에 네덜란드에서 존로에 관심을 끈 것이 있습니다. 바로 주식회사였습니다. 주식회사는 전 세계에 걸쳐 활동하던 네덜란드 상인들 덕분에 생겨날 수 있었죠. 이들은 주로 아시아 지역과 거래를 했습니다. 동인도지역은 향신료 때문에 아주 매력적인 곳이었죠. 고추, 정향(丁香), 육두구(肉荳, Nutmeg), 생강 같은 그런 향신료가 유럽인들에게 인기가 있었죠. 음식 맛도 내주고 장기간 보관할 수 있었으니까요. 네덜란드 상인들은 뱃길로 향신료를 보다 신속하게 운반하고 싶었습니다. 돈 냄새를 맡은 것이죠.



최초로 동양을 방문하고 돌아온 네덜란드 상인들을 그린 그림입니다.


“향신료를 구하러 반탐으로 떠난 선박 4척이 물건을 가득 싣고 암스테르담으로 돌아오다.”

“1598년 3월 1일 출항 - 1599년 7월 19일 귀향”


과연 얼마만큼의 이윤을 창출했을까요? 우려와 달리 단 한 번의 항해로 선박건조비용을 모두 회수했습니다.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 그곳을 향한 항해는 무척이나 길고 위험했습니다. 이 때문에 상인들은 공동으로 출자해 위험을 분산했습니다. 그 결과 동인도회사가 6곳이나 생겼지요.


1602년 네덜란드 정부는 동인도 회사들을 모두 합병했습니다. 네덜란드 연합 동인도 회사를 세우기 위해서였죠. 설립당시에 정부로부터 받은 면허장이 여기에 있습니다. 면허장에는 “희망봉에서부터 마젤란해협에 이르는 구간까지 무역에 있어서 전매권을 인정한다.”고 기재되어 있습니다. 세계의 절반에 가깝죠.


네덜란드 연합 동인도회사의 구조는 독특했습니다. 자본금은 네덜란드 주요도시에 분산되어 있었는데 정작회사는 새로운 사업에 투자하라고 권유함으로써 자금을 확보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투자의 형태입니다.



이 그림은 동인도회사의 창업자 중 한명인 “디르크 바스” 가문의 초상화입니다. 바스를 포함해서 소위 동인도회사의 참여자로 불리는 17명은 6,000길드를 내고 회사의 이사진이 됐습니다. 1606년에는 동인도회사에 투자한 사람들에게 주식 즉 미래에 발생하게 될 권리를 일정부분 부여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다국적 기업에서 발행한 세계 최초의 주식입니다. 지금으로부터 400년 전의 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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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후 바스와 이사진은 주식을 환불하는 것은 불가하지만 투자자들에게 되파는 것은 인정한다고 주주들에게 선언했습니다. 동인도 회사의 주식거래를 시작으로 세계 최초의 주식시장이 문을 열게 되었지요.


주식의 등장은 금융시장의 판도를 바꿨습니다.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주식 가격이 결정되는 세계를 창조한 것이죠. “존로”는 주주들이 동인도회사의 주식매매를 통해 엄청난 부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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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0년 세계최초의 주식회사는 세계를 정복할 태세를 갖췄습니다. 면허장을 갱신하고 새 주주들도 모집했습니다. 물론 주식거래도 활발했죠.  냉혹한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때론 전쟁도 불사했습니다. 동남아 전역에 공장과 상점을 세우고 나니 이번에는 경쟁자인 스페인과 영국의 진출을 견제해야 했습니다. 당시 동인도 회사는 전함 40여척과 10,000명의 사병들을 거느렸는데 이들의 힘은 실로 대단했습니다.


이들에게 군사력은 무역을 하기위한 필수조건이었죠. 그렇다고 동인도회사의 성공비결이 바타비아 함선에 탑재된 대포에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들의 성공은 여느 대기업처럼 비용절감을 위한 비용의 경제, 또한 경제학자들이 흔히 말하는 네트워크의 외부성(한 사람의 행위가 제3자의 경제적 후생에 긍정적 혹은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현상) 즉 취합된 정보의 활용 능력에 있었습니다.


바타비아 함선은 반은 전함, 반은 다국적 기업이었던 것이죠.


간단히 말하면 규모가 크면 효율적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1620년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는 향신료 무역을 독점했습니다. 그 결과 주주들은 돈 방석에 앉았죠.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초창기 주주명부입니다. 모두 엄청난 돈을 벌었죠. 창업당시 1,000길드를 투자했다면 1736년에 그 가치는 무려 7천 길드에 이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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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인도 회사는 매년 이익의 16.5%를 주주들에게 배당했습니다.  디르크 바스 가문의 투자금 6,000 길드는 50만 길드의 자산으로 늘어났죠.


암스테르담에 숨어 지내던 존 로에게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는 하늘의 계시에 가까웠습니다. 당시 존 로는 도박판을 전전하고 있었는데 동인도회사와 이회사의 주식거래를 중개했던 증권거래소 그리고 암스테르담은행 이 3자의 역학관계에 매혹됐습니다. 하지만 뭔가 부족해 보였습니다. 천재 금융가 존 로는 이들 관계에서 결함을 발견합니다.  우선 주식을 제한 한 것부터가 못 마땅했습니다. 게다가 암스테르담은행의 보수적인 운영도 이해가 되지 않았죠. 상인들 간의 자금이체를 통해 결재가 가능하도록 시스템을 만들어놓고 막상 시민들이 사용할 수 있는 은행권은 발행하지 않았으니까요.


이에 존 로는 암스테르담의 주식제도 개선방향을 놓고 고민하기에 이릅니다. 독점무역회사와 발권은행이 생겨난다면 생각지도 못했던 많은 일들이 가능하겠죠. 존 로는 네덜란드에 새로운 금융제도를 선사할 계획을 세웁니다. 1876년 존 로는 자신의 주식 이론을 실험할 무대로 프랑스를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왜 프랑스는 그를 받아들인 걸까요?


이유는 당시 프랑스의 재무상태가 심각했기 때문입니다. 루이 14세의 잦은 전쟁 탓에 나라는 빚더미에 올랐습니다. 1715년 루이 14세가 세상을 떠나자 루이 15세를 대신해서 오를레양공이 섭정하는 동안 무려 3번이나 국가부도가 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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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로에게는 더 없이 좋은 기회였죠.


존 로의 생각은 네덜란드 식 은행을 세워 프랑스 경제를 살리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 같은 100리브르 지폐를 발행하는 것이었죠. 은행에 투자금이 들어오면 그 돈을 정부의 막대한 부채와 통합 운영하는 방식입니다. 지폐를 발행해서 프랑스의 교역을 확대하고 경제력도 키울 수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프랑스 왕실에서 보면 일거양득이었죠. 통합운영으로 정부의 빚을 은행주식으로 전환했고 군주는 원하는 만큼 돈을 발행 할 수 있었습니다.


존 로는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절대 군주는 권력이 제한된 군주보다 더 많은 융자를 보다 낮은 이율로 받을 수 있다. 신용에 대해서도 단 한사람에게 집중되어야 한다.”


절대 권력은 오를레양공의 손안에 있었죠. 존 로는 오를레양공에게 자신의 계획을 알렸습니다. 금융공학을 통해 프랑스의 패권을 부활시키는 것만큼 훌륭한 목표가 또 있을까요? 하지만 존 로에게는 또 다른 생각이 있었습니다.


존 로가 말하길 “은행의 설립은 내 계획 중 유일한 것도 가장 위대한 것도 아니다. 난 인도의 발견보다도 더욱 강력한 것으로 전 유럽을 놀라게 하리라!”


존 로의 두 번째 계획은 바로 독점 무역회사를 설립하는 것이었습니다. 전 국민이 이 회사의 주주가 되고 존 로 자신은 대표이사가 된다는 계획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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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원대한 계획의 중심에는 신대륙이 있었습니다. 미국 미시시피 강가에 펼쳐진 루이지에나의 거대한 땅이 바로 그것이었죠. 마침내 존 로는 새 식민지와의 독점 무역권을 따 냈습니다. 이후 프랑스 국민들은 주식 구매를 권유받았고 이사진 명단 맨 앞에는 그의 이름이 올랐죠.


이것은 통화팽창정책*에 가까웠습니다. 그로인해서 1716년 경기불황으로 몸살을 앓던 프랑스의 경기가 회복됐죠. 프랑스 왕실에서는 공공부문의 부채를 독점 무역권과 세금징수권이 있는 미시시피회사의 주식으로 전화시킬 수 있어서 마다할 이유가 없었죠.

* 통화팽창정책 : 통화수축에 따른 불황상태에서 경제성장을 위하여 통화를 조금씩 늘려 구매력을 높이고 물가를 올리는 정책


대중들은 주식 투기의 광기에 사로잡히게 됐고 미시시피의 주가는 고공행진을 계속했습니다. 1816년 9월 4일 주가는 액면가의 10배인 5,000 리브르를 넘어섰고 1719년 12월에는 10,000리브르에 이르렀습니다.


존 로의 주식발행사무소가 있는 거리입니다. 이 좁은 골목에서 투기에 사로잡힌 파리 시민들이 주식을 사려고 혈안이 된 모습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주가가 오를수록 구매 욕구는 커져갔습니다. 전형적인 주가 과열사태였죠. 이때부터 프랑스에 백만장자란 말이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1720년 1월에는 이들 백만장자 중에 존 로가 가장 부유했습니다.


루이 14세는 “짐이 곧 국가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그에 반해 스코틀랜드 출신의 도망자 존 로는 “내가 곧 경제다.”라고 말 할 수 있는 위치에 까지 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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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돔 광장입니다. 이곳에서 존 로는 프랑스 역사상 가장 강력한 금융 권력을 손에 넣게 됩니다. 프랑스 재무장관의 자리에까지 올라서 많은 권한들을 행사했죠. 간접세의 징수, 국가 부채의 관리, 26개가 넘는 조폐창의 감독, 미시시피 회사의 운영, 이 회사는 아프리카 및 아시아 지역과의 독점 무역권을 누렸었죠. 또한 오늘날 미국영토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루이지에나 식민지 독점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개인 재산도 엄청났습니다. 마자렌궁, 방돔광장에 있는 건물들, 교회저택 12채, 프랑스령 루이지에나의 수많은 농장들, 거기다 1억 리브르 상당의 미시시피회사 주식까지. 12년 전 처음으로 프랑스에 왔을 때 전문 도박꾼에 첩자로 의심받았던 남자치고는 대단한 성공이었죠. 1720년 1월 존 로의 승리는 완벽해 보였습니다. 영국 스코틀랜드의 살인범이 프랑스의 재무장관으로 다시 태어났으니까요.


하지만 존 로는 멈춰야 할 때를 몰랐습니다. 오히려 미시시피 회사의 주가를 올리려고 화폐를 더 찍어낼 궁리를 했죠. 당시 존 로가 소유했던 마자렌궁에는 그의 은행과 회사가 나란히 있었습니다. 자신의 회사 주가를 끌어올리려면 일단 복도를 지나서 주식발행 사무소에 들렀다가 다시 은행권 발행 사무소에 들르면 그만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내부거래였던 것이었죠.


그이 행위는 오늘날 우리가 <폰지사기>라고 부르는 것에 해당합니다. 이탈리아계 미국인 사기꾼 찰스 폰지(Charles Ponzi)의 이름을 딴 것이죠.  다단계 투자 사기처럼 뒤에 들어오는 투자자의 원금으로 앞 사람의 이익을 챙겨주다 끝나는 식입니다. 존 로는 타사를 인수하고 배당금을 제공하기위한 재원을 주식 판매비용으로 마련했던 것입니다.


^^ 폰지게임

미국에 개발 붐이 한창이던 1925년, 찰스 폰지라는 사람이 플로리다에서 막대한 투자배당을 약속하며 투자자를 끌어 모았다. 그러나 실제로 그는 아무런 사업도 벌이지 않았다. 투자금 일부는 자신이 착복하고 투자자들 에게 돌아갈 배당금은 투자자의 납입금으로 지불했다. 이렇게 허황된 꿈 을 파는 사업을 폰지 게임이라 부른다. 이는 사기범이라는 주연과 시민 의식이 부족한 대중이 조연이 돼 주로 성립된다. 따라서 각 개인은 주어지는 정보와 추론에 무조건 의존하지 않고, 여러 대안들을 비교함으로써 가장 적절한 방법을 구해야 한다. 개인의 결정을 보편적 가치에 비추어 보는 비판적이고 개방적인 합리적 사고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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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여느 폰지 사기처럼 언젠가는 터질 거품이었습니다. 지폐도입과 프랑스의 경기부양에는 성공했지만 그가 만들어낸 거품은 언제 터질지 몰랐습니다.


1720년대 초 프랑스는 미시시피 거품 즉 투자광풍에 휩싸였습니다. 무명의 도박꾼에서 프랑스 경제의 주인이 된 <존 로> 하지만 아무리 숲이 울창해도 하늘을 전부 가릴 수는 없었습니다.


존 로는 프랑스령 루이지에나에서 큰 수익을 낼 것을 장담했습니다.  에덴동산과 같은 루이지에나에서 우호적인 원주민들로부터 값비싼 재화를 싸게 구입할 것으로 상상했죠. 원주민들로부터 재화를 얻으면 미시시피 강변의 뉴올리언주를 통해 프랑스에 들여올 예정이었습니다. 식민지에 정착할 이주민들만 있으면 완벽했죠.


존 로는 프랑스인들이 식민지 개척보다는 주식투자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고 개척민들을 모집했습니다. 마침내 수 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약속의 땅 루이지에나로 떠났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말로는 처참했습니다. 불행하게도 약속의 땅 루이지에나는 벌레가 들끓는 늪지였던 것입니다. 1년이 채 지나지 않아서 이민자의 80%가 황열병과 같은 전염병과 기아로 숨지게 됩니다. 루이지에나와의 독점 무역권은 쓸모가 없게 되었죠.


당시 네덜란드의 만평의 내용입니다.

“이 곳이 바로 그 유명한 미시시피 땅입니다.

존 로의 속임수에 속아 많은 사람들이 재산을 날렸죠.

아무리 주식이 인기가 있다고 해도 그저 바람과 연기에 불과 할 뿐입니다.“


존 로의 성공 뒤에는 대중들의 믿음이 있었습니다. 미시시피 사건은 그 믿음을 배반한 사건이었죠.


00:26:53

존 로의 사업에 문제가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미시시피 회사의 주가는 하락했습니다. 주식폭락을 막으려고 존 로는 오를레양공에게 주식의 공식 발행가격을 내려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바로 이때 절대 권력의 한계가 들어나게 된 것이죠. 곧이어 주가는 곤두박질 쳤습니다. 성난 군중은 은행 앞으로 몰려들었고 시민들이 던진 돌에 창문은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12월이 되자 미시시피 회사의 주식은 휴지조각이 됐습니다.


1730년에 발행된 이 지도에는 세계최초의 주식시장이 거품 때문에 어떻게 무너졌는지 묘사되어 있습니다.


행운의 여신이 선물을 던지고 있고 아기천사들에게 주식을 건네받은 투자자들이 미소를 짓고 있죠. 그런데 여기 부서지니 인쇄기 옆에서 주식을 찢고 있는 천사들이 보이죠. 그리고 거품을 만드는 천사들도 보이네요. 오른쪽에는 표정이 심각한 남자들이 있는데 이 중 한 명이 자살을 시도하려고 합니다.


결국 미시시피 거품은 과열되다 못해 폭발했죠. 존 로는 프랑스 국민들에게 쫒겨 황급하게 나라를 떠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생전에 부인과 딸을 보지 못했죠. 베네치아로 돌아온 그는 도박을 하면서 여생을 보냈습니다. 그러다 결국 1729년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00:29:15

존 로가 일으킨 거품의 파열은 프랑스 금융발전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프랑스인들은 화폐와 주식을 멀리했고 프랑스 왕가의 재정문제는 좀처럼 해결되지 않았죠. 루이 15세와 16세의 국정운영은 갈수록 도탄에 빠졌습니다. 결국 프랑스 왕가의 재정파탄이 혁명을 불러오게 됩니다.


1719년에 터진 미시시피 거품이 주식역사상 가장 큰 사건은 아닙니다. 단지 주식시장의 거품을 논 할 때 빼 놓을 수 없을 뿐이죠. 금융계를 발칵 뒤집어놓은 사건은 1929년 10월 24일에 터진 뉴욕 월가의 주가 대폭락사태입니다. 이날을 검은 목요일이라 부를 정도면 그 정도를 아시겠죠. 이 날을 기점으로 미국 주가는 3년 동안 추락을 거듭하다 1930년 2월 바닥을 칠 때는 무려 86%나 빠졌습니다.


뉴욕월가의 주가 대폭락은 인류역사상 가장 심각한 불황을 몰고 왔습니다. 미국의 총 생산량은 급격하게 감소했으며 실업률은 25%에 육박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주가 폭락이 일어나 것일까요? 학계에서도 의견은 분분합니다. 기술적인 분석이야 얼마든지 가능하겠지만 사건의 핵심은 집단심리에 있었습니다.

 

00:31:35

제 아무리 똑똑한 투자자라고 해도 주가가 오르는 강세장에서는 비이성적인 과열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동물들도 마찬가집니다. 무리들이 방향을 틀 때에는 무섭게 돌변합니다. 조그마한 낌새에도 벼랑을 향해 돌진하게 마련이죠.


“한 마리가 공포를 느끼게 되면 소떼는 공포의 냄새를 맡고 달리기 시작합니다. 공포의 대상이 뭔지도 모른 채 두려움에 휩싸여 달리는 것이죠. 결국 공포가 이성을 마비시키는 것입니다. 늘 그런 식이죠.”


주식시장 용어로 매수세가 매도세로 전환되고 황소가 곰이 되는 순간입니다.


소떼에 비유를 했는데요 요점은 인간심리가 시장에 반영된다는 것입니다. 시장은 인간과 마찬가지로 그 기복이 아주 심합니다. 순식간에 탐욕이 공포로 바뀌고 우울증을 넘어 신경쇠약증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자주 발생하는 것은 아닙니다.


금융시장의 움직임을 통계적으로 분포로 예측할 수 있다면 폭락이나 폭등도 없겠죠. 하지만 연중 대부분을 평균적인 분포에 머물다가 예측할 수 없는 수치에 이를 때도 있습니다. 인간의 키를 에로 들어봅시다. 키가 120cm이하이거나 240cm이상인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수학시간에 배운 정규분포도입니다. 빈도에 따라 자주 발생하는 것은 가운데에 아래쪽에는 그보다 낮거나 높은 것들입니다. 곡선이 꽤 가파르죠?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균키에 가까우니까요. 하지만 금융시장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좀 더 완만한 곡선에 가깝습니다. 그 이유는 빈도가 낮거나 높은 움직임이 생각보다 자주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부분이 통계학자가 말하는 <긴 꼬리> 혹은 <두툼한 꼬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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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시장의 움직임이 사람의 키와 같은 분포를 보인다면 주가가 10퍼센트 이상 하락하는 일은 500년에 한번 일어날까 말까한 정도겠죠. 마찬가지로 주가가 20퍼센트 이상 폭락하는 일은 동화 속 이야기일 것입니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이와 같은 일들은 7번이나 발생했습니다.


1987년 10월 사람들은 대공황이 재현될 것이라며 겁에 질렸는데 우려와 달리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한 달 동안 죽어있던 장이 다시 급등세로 돌아섰죠. 하지만 이시기 발생한 거품은 범죄의 온상이 됐습니다.


미시시피회사가 터트린 거품 속에서 18세기를 맞이했다면 20세기를 마무리하는 거품은 다른 곳에서 터졌습니다. 투자자들을 탐욕의 꿈 너머로 몰아갔던 한 회사. 이 회사는 전 세계 금융시장을 바꿔놓겠다고 호언장담했는데 막강한 정치인맥을 활용해서 강세장의 맨 위에 올라섰습니다.



Fortune지가 6년 연속 미국에서 가장 혁신적인 회사로 선정한 바로 엔론사입니다. 엔론사가 파산한지도 7년이 지났습니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차츰 잊혀져가고 있죠. 하지만 엔론사의 분식회계는 오늘날까지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2000년 8월 미국 휴스톤에 있는 엔론사의 주식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습니다. 엔론사는 네브라스카주의 작은 천연가스회사로 출발했고 미국에서 다섯 손가락에 들어가는 대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월가로부터 사랑받을 수밖에 없었죠.


00:36:15

하지만 투자자들이 역사의 교훈을 새겨들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 것입니다. 엔론사의 이야기는 주인공만 바뀌었지 280년 전에 있었던 미시시피 거품과 유사합니다.  존 로가 프랑스의 재정개혁을 목표로 삼았다면 엔론사의 회장 켄 레이(엔론사의 회장으로 대규모 회계부정을 주도함)는 국제 에너지 시장을 개혁하고자 했습니다.


거대 전력회사들은 수 년 동안 에너지산업을 주도해왔습니다.  에너지를 직접생산해서 소비자들에게 팔았죠. 켄 레이는 에너지 은행을 만들어 생산자와 소비자를 중계해 에너지를 팔고자 했습니다. 엔론사를 세계최고의 에너지회사로 만들고 싶어 했죠. 엔론사의 전직 임원인 셰런 왓킨스의 말을 들어보겠습니다.


셰런왓킨스(엔론사 전 임원)

“정말 좋은 시절이었습니다. 아이디어만 괜찮다면 엔론사의 자금지원으로 사업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존 로처럼 켄 레이도 권력 가까이 있었습니다. 조지 허버트 부시대통령의 선거 자금을 지원해서 많은 이득을 봤죠. 부시 대통령은 에너지산업과 관련한 규제를 풀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부는 에너지 사업의 민영화를 타고 엔론사는 자산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중남미지역에서는 콜롬비아,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에 이르기까지 대규모 송유관 사업을 벌였죠,


켄 레이는 절친한 친구 조지부시 대통령의 도움을 받아서 이곳 아르헨티나에서 세계 최대의 천연가스관을 건설했습니다. 엔론사는 에너지뿐만 아니라 흙, 물, 공기와 같은 자원을 비롯해 심지어 인터넷 대역폭까지 거래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그 옛날 미시시피회사와 흡사한 사건이 뉴욕 월가에서 벌어지고 있었죠. 비이성적인 과열에 대해서 경고했던 앨런 그린스펀*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앨런 그린스펀 : 미국의 경제학자이자 경제 관료로 1987년부터 2006년까지 미국 연방 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을 역임함


주식시장에서 자금이 유동적으로 공급될 때 거품이 생성됩니다. 1990년 6월부터 1995년 2월까지 기준금리를 한 차례 올린결과 엄청난 유동성이 확보됐죠. 투자자들을 비롯해서 스톡옵션을 받은 회사의 임원들은 엄청난 부를 손에 넣을 수 있었습니다. 1997년부터 3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에 엔론사의 주가는 다섯 배로 뛰었고 20달러는 순식간에 90달러가 됐죠. 그야말로 미시시피사태의 재현이었습니다.


00:39:45

당시 원유매장이 있던 휴스턴의 경제는 낙관적이었는데 이 곳 조차도 처음 경험하는 풍요였습니다. 이곳 리버오크스는 휴스턴에서도 가장 부유한 동네입니다. 켄 레이와 엔론 임원들 대부분이 이곳에서 살았죠. 엔론이 파산하던 해에 최고위층 150명에게 평균 530만 달러가 돌아갔습니다. 고급자동차가 잘 팔릴 수밖에 없었죠.


셰런왓킨스(엔론사 전 임원)

“당시 엔론사의 임원들은 연봉에 훨씬 넘는 금액을 보너스로 받았습니다. 연봉의 75퍼센트 정도를 받으면 무안해 할 정도였죠. 적어도 연봉에 네 다섯 배는 받아야 체면이 섰으니까요. 꽤 큰 금액이었죠.”


켄 레이는 회사를 경영할 때 다음과 같은 윤리기준을 내세웠습니다.


켄 레이

- 엔론사는 어떤기업과도 정직하게 거래를 한다.

- 법과 규칙을 준수하고 무엇보다 신용을 우선한다.

-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


하지만 엔론사 역시 정교한 사기극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전화통화내용 1)

엘파소전기회사 : 엘사소입니다.

엔론사직원 : 엔론사의 데이비드입니다. 전력수요가 적어서 상황이 좋지가 않네요.

엔론사 직원과 엘파소전기회사 직원이 나눈 대화를 녹음한 것입니다. 전력을 제한하는 방법으로 발전소 가동을 중단하는 것을 논하고 있죠.


(전화통화내용 2)

엔론사직원 : 화력발전기를 껐다가 가동하는데 얼마나 걸리죠? 서 너 시간이면 충분하죠?

엘파소전기회사 : 네 그럼요.


엔론사직원 : 괜찮다면 한 대 정도는 꺼두죠.

엘파소전기회사 : 그러죠.


결과적으로 엔론의 주가는 상승했지만 소비자들은 정전 때문에 불편을 격어야 했죠.


엔론사는 이런 방식으로 벌어들인 돈을 온갖 방법으로 횡령했습니다. 장부를 조작해서 자산을 증액하기도 했죠. 그리고 특수목적법인을 설립해 대차대조표상의 부채를 숨겼습니다. 이 중에는 “츄크”나 “랩터”같은 독특한 법인명도 있습니다.


엔론사는 손실을 이익으로 둔갑시키고자 다양한 속임수를 썼습니다. 하지만 오래가진 못했죠.


셰런왓킨스(엔론사 전 임원)

“장부를 조작하다보면 결국엔 망 할 수밖에 없습니다.”


야망의 끝이 보이기 시작하자 켄 레이와 임원들은 수억 달러의 주식을 시장에 내다팔기 시작합니다. 물론 대중들에게는 주가가 계속 오를 것이라고 헛소문을 퍼뜨렸죠.


존 로가 미시시피회사의 주가폭락을 막지 못했던 것처럼 켄 레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2001년 11월 15일 미국 연방 준비제도이사회의 의장 앨런 그린스펀은 공공서비스분야에서 엔론상을 받았습니다. 그의 수상은 당연했습니다. 1990년대 말 앨런 그린스펀의 금융정책결과로 엔론거품 및 IT거품이 터졌으니까요. 그 수상식이 끝나고 2주 만에 엔론사는 파산신청을 했습니다. 과연 빚이 어느 정도였을까요?


셰런왓킨스(엔론사 전 임원)

“2001년 엔론사는 파산신청을 하려고 채권단과 만난 자리에서 폭탄선언을 했습니다. 대차대조표상에는 장기차입금에 130억 달러라고 나와 있었지만 사실은 380억 달러라고 밝혔죠. 무려 250억 달러의 부채가 장부 뒤에 숨어있었던 것입니다.”


니알 퍼거슨

“부채금액에 다들 놀랐겠군요. 설마 그 정도 일 줄은 상상도 못했겠죠.?”


셰런왓킨스(엔론사 전 임원)

“그럼요! 다들 놀라서 쓰러질 지경이었어요.”


엔론사의 직원 4,500명이 해고되기 바로전날 임원들에게는 최후의 만찬으로 보너스가 지급됐습니다.


2006년 5월 켄 레이는 유가증권법 및 통신법 사기죄로 기소되어 유죄선고를 받았습니다. 그의 신복 제플리스킬링은 24년 징역형을 선고 받았죠. 켄 레이는 형이 확정되기 전 콜로라도주에 있는 아스펜에서 휴가를 보내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사라졌지만 그가 저지른 부정한 수법들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엔론사가 벌린 분식회계*는 서양금융권에 관심을 끌었죠.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 같은 부정행위 때문에 오늘날의 금융위기가 발생한 것입니다.


* 분식회계 : 기업이 고의로 자산이나 이익을 부풀려 부채를 적게 계산함으로써 재무상태나 경영성 재무상태의 변동을 조작하는 회계방식


셰런왓킨스(엔론사 전 임원)

“엔론사의 금융회계방식이 마치 전염병처럼 금융권에 퍼진 것입니다. 엔론사의 거래원들과 은행직원들 그리고 에너지거래소 직원들 까지도 말이죠. 금융시장 전반이 부패한 것입니다.”


00:45:38

유한책임주식회사는 놀라운 조직입니다. 하지만 이회사가 등장하고부터 기업들의 부정행위는 늘었고 주식시장도 비이성적일 때가 많았습니다. 사실 기업과 주식시장은 쌍둥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한쪽이 이유 없이 날뛰면 다른 쪽도 함께 휩쓸려 날뛰니까요


지난해 발생한 금융위기에서 경험했듯이 금융시장은 우리 뜻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신용경색이 시작되고 주가가 반 토막이 난 경우를 세계 각지의 주식시장에서 쉽게 볼 수 있었죠. 미래에 대한 기대치가 과도한 낙관에서 과도한 비관으로 바뀌고 사람들의 탐욕이 공포로 돌아서는 순간 주가는 또 다시 불규칙한 곡선을 그릴 것입니다. 마치 안데스 산맥처럼 말이죠.


투자자로서 바라는 것은 단 하나. 정상에 내려올 때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것이 아니라 평탄한 언덕을 따라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위태로운 금융시장에서 자신을 지키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돈의 힘 4부에서는 수익만큼 중요한 위험요소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그때까지 이 질문을 되새겨보십시오.


보험에 가입하셨나요? 아니면 헷지 상품에 투자하셨나요?


THE ASCENT OF MONEY  / 돈의 힘

BLOWING BUBBLES / 3부 거품과 붕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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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eenir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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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SCENT OF MONEY  / 돈의 힘

HUMAN BONDAGE / 2부 지불약속


제작 : chimerica Media (영국 2008 - BBC방영)


사람들은 대통령이나 의회의 수상이 권력을 쥐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현대사회에서 진정한 권력은 소수의 엘리트집단이 쥐고 있습니다. 그들은 세계 채권시장을 좌우하는 이들이죠. 빌 그로스는 세계최대의 자산운용사인 핌코의 회장입니다. 이 회사는 무려 7조 달러나 되는 금융자산을 운용하고 있죠. 사람들은 그를 채권시장의 황제, 미스터 본드라고 부릅니다.


채권 (정부 혹은 은행이나 회사가 사업에 필요한 자금을 차입하기위해 발행하는 유가증권)


00:00:50:00

채권은 금융거래시장과 정치권을 이어주는 연결고리입니다. 정부는 징수한 세금보다 더 많은 돈을 지출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럴 경우 채권을 팔아서 그 차액을 메우죠. 그런데 만약 여러분이 구입한 채권을 처분하고 싶을 때에는 금융거래 시장에 그 채권을 내다 팔면 됩니다.


금융의 역사에서 채권시장의 탄생은 은행의 대두 다음으로 큰 혁명이었습니다. 정부가 돈을 빌릴 수 있는 새로운 창구가 열린 것이죠. 약 600년 전 이탈리아에서 전쟁이 일어나자 채권시장은 전쟁자금을 지원하게 됩니다. 채권시장은 워털루전쟁의 승패를 결정했고 세계적인 금융가문을 탄생시켰습니다. 미국 남부전쟁에서 남부가 패한 원인이기도 했죠. 아르헨티나와 같은 부국을 무릎 꿇게 했을 정도로 채권시장의 힘은 막강합니다.


00:02:02:00

오늘날 세계 각국의 정부와 회사들은 채권을 담보로 엄청난 돈을 빌리고 있습니다. 약 85조 달러의 채권이 시장에서 거래되고 있죠. 우리의 운명은 채권시장에 달렸습니다. 채권시장이 포화상태가 되면, 자산가치가 높은 집값은 하락합니다.  2007년 여름 전 세계에 강타한 경제위기, 이런 혼란 속에서 미국의 국공채는 투자자들의 안전한 은신처가 됐습니다.


만약 빌 그로스가 채권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다면 세계경제는 그야말로 원자폭탄을 맞을 것입니다. “빌 그로스”는 영화 007에 나오는 제임스본드보다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두 명의 본드에게는 일종의 살인면허가 있는 셈이죠.


00:03:15:00

THE ASCENT OF MONEY  / 돈의 힘

HUMAN BONDAGE / 2부 지불약속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전쟁”을 두고 모든 것들의 아버지라고 말했습니다. 채권시장을 낳은 것도 바로 전쟁이죠. 피렌체와 피사, 시에나 등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도시들은 중세 대부분을 전쟁 속에서 보냈습니다. 전쟁의 원인은 인간의 탐욕과 돈 이였죠.


 

피에르 반 헤이든 <돈 자루와 궤의 전쟁>

00:04:00:00


피에르 반 헤이든의 판화 “돈 자루와 궤의 전쟁”에는 돼지 저금통과 보물 상자, 동전이 가득한 자루들이 창과 칼 사이에 어지럽게 놓여있습니다. 그림에는 이런 문구도 적혀있습니다. “이 전쟁은 돈과 재물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돈이 없다면 전쟁도 없다.”는 뜻이겠죠.


채권시장을 통해 전쟁자금을 지원하는 방법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 최대발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르네상스시절 도시국가들은 주변국의 영토와 재산을 몰수하기 위해서 콘도티에리(르네상스 시절 이탈리아에서 활동하던 용병징집인) 즉 “용병징집인”을 고용했습니다. 1360대와 70년대 활동했던 콘도티에리 중에서 주목할 만한 사람이 있습니다. 피렌체대성당에 전시된 이 그림 속 인물이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영국 잉글랜드 에스엑스 출신인 그는 타고난 전쟁광이었습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그를 존 호크우드경 이탈리아어로 <지오바니 아큐터>라고 불렀죠.


이 성은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그에게 피렌체 사람들이 보상명목으로 제공한 부동산 중 하나입니다. 호크우드는 용병이었기 때문에 돈만 받으면 누굴 위해서든 싸웠습니다. 밀라노, 파도바, 피사 등 도시국가들은 물론 교황까지도 그를 고용했죠.


00:06:00:00

피렌체 <베키오 궁전>에 전시된 이 그림은 1364년 피사와 피렌체의 전쟁을 묘사한 작품입니다. 당시 호크우드는 피사의 용병대장 이었지만 15년 후에는 돈을 받고 피렌체를 위해서 싸웁니다. 계속되는 전쟁으로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은 위기에 처합니다. 이들 국가들의 지출은 해마다 두 배로 늘었고 시민들이 내는 세금도 마찬가지였죠. 또한 용병들에게 임금을 지불하느라 늘 적자에 허덕였습니다.

 

피렌체의 공문서 보관되어 있는 이 자료에 따르면 14세기 5만 플로린(플로린화:13세기 피렌체에서 통용되던 금화)에 이르던 시의 부채가 1427년에는 500만 플로린으로 늘었다고 합니다. 부채가 산더미처럼 쌓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엄청난 부채를 어떻게 충당 했을까요? 답은 바로 피렌체 시민들에게 있습니다.


정부가 시민들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대신에 시민들로부터 돈을 빌렸던 것입니다. 물론 의무적으로 말이죠. 시민들은 이러한 강제성을 수반한 대부에 대한 대가로 이자를 받았습니다. 장부에 적힌 이 부채의 목록이 바로 정부 채권입니다. 당시 정부채권은 유동자산으로 급전이 필요할 때면 팔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죠. 이 장부는 피렌체정부가 시민들을 어떻게 투자가로 변신시켰는지를 보여줍니다.

00:08:05:00

채권은 도시국가의 파산을 막았고 시민들은 이자를 받아서 모두에게 남는 장사였죠. 채권시장은 시민들의 거래를 허락했습니다. 그러자 공공채무가 정리된 것처럼 보였죠. 하지만 이 멋진 발생에도 치명적인 결점은 있었습니다.


아무 이득이 없는 전쟁을 계속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탈리아의 도시들은 부채가 늘자 채권을 더 많이 발행했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채권의 가치는 떨어졌습니다. 결국 베네치아에서 사건이 터졌습니다. 16세기 초 베네치아에서는 군인들이 여러 차례 폭동을 일으켰는데 그 일로 베네치아의 채권가치가 땅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1509년부터 29년까지 베네치아의 몬테누에보 채권은 액면가 10%에 거래됐었습니다. 전쟁 중에 채권을 사려면 어느 정도 위험을 감수해야만 합니다. 정부가 원금이나 이자를 지급하지 못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채권은 액면가에 따라 이자가 지급되기 때문에 운이 좋으면 액면가의 10%만 지불하고도 이자를 50%까지 받을 수 있죠. 이것이 바로 채권시장의 원리입니다. 위험을 감수할 용기만 있다면 원금을 회수 할 수도 있는 것이죠. 또한 금융시장 전체 이자율을 결정하는 것 역시 채권시장입니다.


르네상스시절 전쟁자금을 위해 고안된 채권이 전체 금융이자율까지 좌지우지하게 된 것입니다. 채권의 힘이 막강해 진 것이죠. 그 후로도 채권은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00:10:38:00

<로스차일드가 저택>



워털루전쟁(1815년 6월 나폴레옹 1세가 이끈 프랑스군이 영국, 프로이센 연합군과 벨기에 남동부 워털루에서 벌인 전투) 승패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금융재벌의 저택입니다. 이 가문은 자타가 공인하는 금융황제를 배출했죠. 그는 19세기 채권시장의 진정한 황제였습니다. 엄청난 부를 소유했던 네이선은 자신이 전쟁과 평화의 중재자라고 큰 소리 쳤습니다. 또한 국가의 신용이 자신의 손에 달렸다고도 했죠.



이는 뛰어는 채권거래상이자 훗날 세계최대 은행의 주인이 될 네이선 로스차일드(Rothschild)를 두고 1828년 영국의회의 급진파 의원이었던 토마스 돈스컴이 했던 말입니다. 채권시장은 로스차일드 가문에게 엄청난 부를 선사했습니다. 이들은 유럽전역에 걸쳐 41채나 되는 저택을 소유했을 만큼 큰 부자였죠. 버킹험셔에 위치한 이 저택은 현재 네이선 로스차일드의 4대손인 제이콥 로스차일드가 관리하고 있습니다.

* 네이선 로스차이드 (로스차일드 집안의 창시자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의 셋째 아들)


* 제이콥 로스차일드

“4대 조부는 영리한 분이셨습니다. 욕심도 많았습니다. 늘 무엇인가에 집중하셨는데, 함께 있으면 늘 즐거운 사람은 아니었죠.”


1810년부터 1836년 사이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의 다섯 아들들은 국제금융계의 거물로 급부상합니다. 영국에서 로스차일드 가문을 일으킨 장본인은 셋째아들 네이선이었습니다. 네이선의 고손자인 에블린 로스차일드는 네이선이 설립한 은행의 회장직에서 최근에 물러났습니다.


*에블린 로스차일드

“고조부는 야망이 컸습니다. 그래서 영국으로 이주하셨죠. 어리석음이 싫어하셨는데 우리가문의 내력이죠.”


네이선 로스차일드가 형제들에게 편지입니다. 그는 누가 보지 못하게 항상  주덴도이치(히브리 문자를 사용한 독일어로 우편물의 내용을 엿보는 걸 막기 위해 사용했음)로 편지를 썼습니다. 편지를 보면 그가 형제들에게 직업정신을 심어주고자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몇 줄 읽어드리죠.


“사랑하는 큰 형님, 형님에게 편지로 제 생각을 전하는 일은 제 의무입니다. 형님은 아실 거예요. 저는 지금까지 줄곧 저녁식사를 마치고 난 뒤 흔히 하는 독서나 카드놀이, 영화감상 같은 취미생활을 하지 않았어요. 저의 유일한 즐거움은 <사업>뿐이죠”


00:13:42:00

열정과 타고난 경제적 감각을 바탕으로 네이선은 게토의 무명인이서 런던 채권시장의 황제로 우뚝 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금융시장이 비약적으로 발전을 하게 되는데 역시 전쟁을 통해서였죠.


1815년 6월 18일 아침 영국과 네덜란드, 독일병사 6만 7천여 명이 영국의 웰링턴공작의 지휘아래 벨기에 남동부에 위치한 워털루에 포진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이 이끄는 군대가 진격해 오고 있었기 때문이죠. 워털루 전투는 영국과 프랑스간의 갈등이 절정에 이른 결과로 두 나라 금융제도의 우열을 가르는 전투였습니다. 전쟁자금을 약탈에 의존했던 프랑스와 채권에 의존했던 영국의 금융싸움이었죠.


전쟁비용을 마련하기위해 영국정부는 전례 없는 엄청난 양의 채권을 발행했습니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백만장자가 된 것은 워털루전투의 승패가 채권가격에 미칠 영향을 정확히 예측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100년 후 나치독일은 이 유대인 가문의 부당 이익을 폭로하기 위해서 영화 <로스차일드家>의 상영을 허가 합니다. 영화에 따르면 네이선은 프랑스장군을 매수해 영국군의 우세를 확인합니다. 그리고 나서 영국군이 열세라고 런던에 헛소문을 퍼뜨리죠. 놀란 영국인들이 헐값에 영국채권을 처분하자 네이선은 서둘러서 채권을 사 드립니다.


하지만 1815년의 상황은 크게 달라졌습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워털루전투에 대한 거짓정보를 흘려서 큰  돈을 벌 것으로 예상을 했는데 오히려 최대 위기를 맞습니다. 당시상황에 대해 설명해 드리죠. 영국정부는 채권판매로 엄청난 현금을 보유하게 됩니다. 하지만 웰링턴 공작에게 채권은 쓸모가 없었죠. 군인들에게 급료를 주고 동맹군에게 사례금을 주려면 언제어디서나 지불가능한 통화가 필요했습니다.


결국 네이선 로스차일드는 채권시장에 빌린 돈을 금으로 바꿔 웰링턴 공작에게 전달합니다. 이를 계기로 전쟁당사국들은 물론 전 유럽의 운명이 바뀌었죠.


이 편지 한 장이 영국정부와 로스차일드가의 운명을 바꿔났습니다. 1814년 1월 11일 영국의 재무장관은 영국군 총 사령관에게 편지를 보내서 네이선 로스차일드를 영국정부의 대리인으로 임명할 것을 명령합니다. 네이선의 임무는 유럽대륙에서 금과 은을 최대한 많이 모아 프랑스 남부로 진격중인 웰링턴 공작에게 전달하는 것이었습니다. 네이선은 유럽전역에 뻗어있던 로스차일드가문의 신용 네트워크를 이용해서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게 됩니다.


00:17:30:00

전쟁 중에 많은 양의 금을 운반하려면 그만큼 위험부담이 큽니다. 하지만 로스차일드가문은 위험한 만큼 고액의 수수료를 받을 수 있어서 괜찮은 거래라고 생각했죠. 곧이어 이들 가문은 영국정부의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존재로 부상합니다.


영국군 총 사령관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네이선 로스차일드는 자신의 임무를 존경스러울 만큼 훌륭하게 수행했다. 그가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우린 그를 믿는다.”


로스차일드는 가족중심의 은행 네트워크를 구축해 전쟁자금을 지원했습니다. 셋째아들 네이선은 런던에 장남 암셀은 프랑크푸르트에 막내 제임스는 파리에 넷째 칼은 암스테르담에 있었고 둘째 살로몬은 유럽을 오가며 작전을 도왔습니다.


예를 들어 파리의 금값이 런던보다 비쌀 때는 파리에 있는 막내 제임스가 금을 팝니다. 그 다음에는 런던에 있는 네이선이 사는 방식이죠.


* 제이콥 로스차일드

“로스차일드 가문이 금융시장에서 우위를 차지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유럽의 금융요지에 형제들을 심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금융네트워크의 중요성을 발견하고 그것을 충분히 활용했던 것이죠. 어쨌든 세계를 좌우 할 정도로 막강한 금융네트워크를 구축한 점은 놀랍습니다.



1815년 3월 나폴레옹은 유배지인 엘바섬을 탈출해  파리로 돌아옵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즉시 금괴와 은괴 동전을 사 모으기 시작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나폴레옹이 주도한 이전의 전쟁들이 그랬듯 장기전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결국 사람들은 금을 찾을 테고 당연히 가격도 오를 테니까요.


하지만 이는 엄청난 계산착오였습니다.


 

00:20:00:00

하루 동안의 치열한 공격과 반격 끝에 프로이센 군대가 합세하면서 전투의 승패가 결정되었습니다. 웰링턴 장군은 명예로운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반면에 로스차일드가는 아니었죠. 네이선 로스차일드는 발 빠른 정보망을 통해 나폴레옹의 패배소식을 접하고 기뻤겠죠. 그는 영국내각에 공식보고가 전해지기 이틀 전에 이미 승전보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영국의 승리는 네이선에게 득이 될 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무용지물이 된 금(金)을 싼값이 샀을 뿐이니까요. 전쟁이 끝난 뒤 그와 형제들은 아무도 원하지 않은 금더미위에 앉아 있었던 것입니다. 전쟁이 끝나면 군대는 해산될 것이고 군인들에게 금을 지불 할 필요가 없게 되어 치솟았던 금값이 폭락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엄청난 손실을 눈앞에 두고 네이선은 결심을 하게 됩니다. 해결책은 오직 하나, 로스차일드 가문의 금을 이용해 도박을 하는 것이었죠. 바로 채권시장을 통해서 말입니다.


1815년 7월 20일 런던 코리어신문은 네이선이 공채를 대량으로 매입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영국정부의 채권을 사 들였다는 뜻이죠. 워털루 전투의 승리로 영국의 채권가격이 치솟을 것이라는 예측에 네이선은 승부수를 띄었습니다. 채권이 대량매입으로 가격이 오르기 시작하자 네이선은 계속해서 채권을 사들였습니다.


채권을 팔라는 형제들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고집을 부렸죠.  그 후 일 년이나 계속해서 말입니다. 1817년 7월 채권가격이 40%까지 상승하자 네이선은 채권을 되팔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그가 남긴 시세차익은 현재로 치면 6억 파운드에 이릅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채권을 사고팔아 이익을 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


00:22:38:00

돈은 곧  권력이라는 사실을 증명했죠. 메이어 암셀 로스차일드는 다섯 아들들에게 사랑받기보다는 사람들이 너희들을 두려워하도록 만들라고 당부했습니다. 실제로 19세기 중반의 금융권을 지배하는 동안 로스차일드 가문은 존경보다는 두려움의 대상이 됐죠. 지금은 증오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이 반유대주의의 편견을 자극했기 때문이죠.


* 제이콥 로스차일드

“포스터를 수집하는 동료가 몇 달 전에 반유대주의를 표방한 아주 독특한 포스터를 가지고 왔습니다. 우리 로스차일드 가문을 남을 괴롭히는 지독하고 못된 사람들로 표현했더군요. 유대인들이 행했던 자본주의 경제활동을 아주 신랄하게 비판한 포스터 같았습니다.”


사람들이 로스차일드 가문을 증오하는 이유는 전쟁을 일으키기도 하고 막기도 하는 그들의 양면성 때문입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전쟁이 필요했습니다. 전쟁을 통해서 부를 창출했으니까요. 전쟁이 없었다면 19세기 국가들은 채권을 발행 할 필요도 없었겠죠. 그런데 이 보다 더 큰 문제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전쟁자금을 마련하려면 정부는 엄청난 빚을 지게 되고 만약 빚을 갚지 못하면 이미 발행한 채권에 문제가 생기고 말죠. 19세기 중반에 로스차일드 가문은 펀드 매니저가 되어 국공채를 관리합니다. 그로인해서 전쟁을 통해 얻는 득보다 실이 많게 되죠.

00:24:35

로스차일드 가문은 돈의 힘으로 워털루전투에서 영국에 승리를 도왔고 미국 남북전쟁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채권시장의 황제가 전쟁의 조정자가 된 것>이죠. 워털루 전투가 끝나고 50년 후 지구 반대편에서 또 다른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이 전쟁역시 배후에 채권 시장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채권시장을 믿고 승부수를 던진 사람들은 과거와 달리 패하고 맙니다.


전쟁이 발발하고 2년 뒤인 1863년 6월 미국 <남북전쟁>(1861년에서 1865년까지 미합중국의 북부와 남부가 4년에 걸쳐 벌인 내전內戰)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됩니다. 당시 북군은 미시시피 주의 수도였던 잭슨을 점령하고 남군을 서쪽의 피츠버그까지 후퇴시킵니다.  북군에 포위된 채 끈질기게 저항하던 남군은 결국 한달 만에 항복을 하고 맙니다.


피츠버그 전투 후 미시시피 강은 북군의 손에 넘어갔고 남군은 동서로 분열되었습니다. 그렇다고 남군이 패한 결정적인 요인이 피츠버그에서의 후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패전의 진짜이유는 재정문제였습니다.


00:26:45

피츠버그에서 하류로 내려가면 미시시피 강과 멕시코 만이 만나는 곳에 뉴올리언스 항이 있습니다. <파이크 요새>입니다. 영국의 공격으로부터 뉴올리언스를 지키기 위해 1812년에 세운 것이죠. 하지만 50년 후 북군이 뉴올리언스를 공격했을 때 요새는 그만 함락당하고 맙니다. 당시 뉴올리언스는 남부의 주력 수출품인 목화의 판로였기 때문에 손실이 아주 컸죠.


 

목화무역을 주도할 수 없게 되자 남부의 운명은 달라졌습니다.  목화는 채권시장을 전쟁에 끌어들이려는 수단이었기 때문이죠. 500여 년 전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처럼 남부 연합은 시민들에게 채권을 팔아 전쟁비용을 충당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남부의 자본은 한정되어 있었죠. 궁리 끝에 남부 연합은 유럽최대의 금융가문인 로스차일드 가문에 손을 내밉니다.


남부 연합이 이를 낙관한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뉴욕의 로스차일드 대리인이 새롭게 당선된 링컨대통령에게 반감이 있었기 때문이었죠. 그러나 로스차일드가는 남부 연합의 손짓에 주저했습니다. 남부에 돈을 빌려줄 수도 있지만 이미 가치를 상실한 난부의 채권을 사들이는 것은 모험에 가까웠으니까요. 결국 로스차일드가는 나서지 않기로 결정했죠.

 

00:29:00

궁지에 내몰린 남부 연합은 새로운 작전을 구상했습니다. 바로 목화를 이용하는 것이었죠. 남부는 목화를 채권 지불 담보물로 내놓았습니다. 이자를 지불하지 못할 경우 목화로 대신하겠다며 투자자들을 안심시켰죠. 결국 남부의 대리인들은 남부 연합의 채권을 팔기위해 유럽의 주요도시로 떠났습니다. 그들은 유럽의 금융요지를 중심으로 채권을 팔기위해 노력했지만 투자자들은 거들 떠 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프랑스의 한 무명회사가 목화담보채권을 시장에 내 놓자 상황은 역전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회사 채권을 목화로 전환할 수 있었기 때문이죠. 그것도 전쟁 전 가격으로 말입니다.


<목화담보채권>은 남부의 새로운 전략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목화의 공급을 제한 할 경우 목화와 채권의 가격이 동반상승할 테니까요. 이제 남부 연합은 목화로 영국을 위협하기에 이릅니다.


00:30:40

1860년 영국의 리버풀 항은 섬유산업에 필요한 목화를 수입하는 주요 관문이었습니다. 당시 리버풀로 들어오는 목화의 80%는 미국 남부에서 생산된 것이었죠. 목화의 중요성을 안 남부 연합은 리버풀로 향하는 모든 선박의 출항을 금지했습니다. 영국을 자신들의 편으로 만들기 위한 전략이었던 것이죠. 결국 남부의 의도대로 목화 값이 치솟았고 남부 연합의 목화담보채권도 덩달아 가격이 올랐습니다. (남부 연합의) 출항금지조치는 영국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고 방직공장들은 노동자들을 해고해야 했습니다. 결국 1862년에 모든 방지공장이 가동을 멈췄습니다.


 맨체스터 남부 스타이얼에 위치한 이 방직공장에는 노동자 400여명이 근무했는데 목화가 없으니 당연히 할 일이 없었겠죠. 결국 공장노동자 절반가량이 해고됐고 지역주민 중 1/4정도가 빈민구제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이 사태를 두고 <목화기근>이라고 불렀지만 이는 인위적인 기근이었던 것이었죠.


00:32:15

영국경제는 침체에 빠졌고 목화담보채권의 가격은 계속 상승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남부 연합이 채권시장을 마음대로 조종하려면 투자자들이 채권의 이자를 지급받지 못할 경우 남부가 나서서 목화소유권을 보장해 준다는 전재조건이 필요했습니다.


앞서 1862년 4월 28일 뉴올리언스가 함락되었을 당시 미국 남북전쟁이 전환기를 맞이했다고 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결국 남부의 주요항구가 북부군의 손에 들어가자 목화를 손에 넣고 싶어 하는 투자자들은 북군 해군의 철통같은 봉쇄선을 뚫어야 했습니다.


남부 연합이 목화공급을 중단하자 1863년 랭크셔의 방직공장들은 중국과 이집트 인도지역에서 새로운 목화공급원을 찾았습니다. 그러자 목화담보채권 투자자들의 신뢰와 남부경제가 동시에 붕괴되었습니다. 목화공급능력을 과시했던 남부 연합이 보기 좋게 무너진 것이죠.


00:33:35


국내채권시장이 몰락하자 당장 전쟁자금을 지급해야 했던 남부 연합은 루이지에나 주립박물관에 있는 이러한 지폐들을 마구 찍어내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남부 연합은 총 17억 달러를 발행했다고 합니다. 북부 연합도 지폐를 발행했는데 전쟁의 막바지에
북부의 그린백이 장당 50센트였다면 남부의 그레이백은 1센트에 불과했죠. 결국 남부는 그 심한 인플레이션에 시달려야만 했습니다. 1865년 1월에는 물건 값이 기존가격에서 90배로 치솟기도 했습니다.


승부를 채권시장에 걸었던 남부는 결국 전쟁에서 패했습니다. 하지만 최악의 인플레이션을 몰고 온 이같은 무모한 시도는 그 후로도 계속 반복됩니다.


00:34:40

오늘날의 채권시장은 전 세계 주식시장을 합한 것 보다 그 규모가 큽니다. 한 국가의 흥망성쇠를 결정하기도 하죠. 채권시장의 황재라 불리는 이 사람이 한때 라스베이거스에서 활약했던 카드선수였던 사실을 아십니까?



빌 그로스 (채권펀드사 핌코 회장)

“전 블랙잭 선수였는데 최초의 직업선수 중 한 명이었습니다. 꽤 잘 나갔죠. 라스베이거스를 정복하고 싶어 60년대 말부터 카드 플레이어로 몇 년 동안 활동했습니다.”


빌 그로스는 현재 채권시장의 황제가 되어 거액의 채권펀드를 관리하고 있습니다.  빌 그로스의 채권거래는 금융시장과 정부를 비롯해서 연금기금과 주택담보대출 이자율에도 영향을 주죠. 하지만 세계금융시장을 호령하는 황제에게도 두려운 것이 있습니다. 바로 인플레이션입니다.


*인플레이션 : 화폐가치가 하락하고 물가가 상승하는 경제현상

인플레이션이 위협적인 이유는 채권의 고정이율가치를 떨어뜨리기 때문입니다.


빌 그로스 (채권펀드사 핌코 회장)

“예를 들어 물가가 10% 상승했는데 고정이율의 가치가 5%밖에 안 된다면 채권소유자들은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5%나 손해를 보는 것이죠.”


그렇게 때문에 인플레이션 초기에 채권가격이 하락하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폭락을 지속하기도 합니다.


인플레이션이라는 고약한 녀석 때문에 상황이 어떻게 악화되는지 궁금하시다면 <아르헨티나>를 예로 들어보죠. 아르헨티나의 경제는 1946년 2월부터 악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때마침 이시기에 대통령에 선출된 후안 페론(아르헨티나의 군인이자 정치가로 세 차례에 걸쳐 대통령을 역임)이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중앙은행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은행의 넘쳐나는 금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구나! 은행전체가 금으로 가득해 걷기조차 힘들다니...”


아르헨티나는 은의 땅이라는 뜻으로 부와 풍요를 상징합니다. 수도를 따라 흐르는 리오델라플라타강 역시 “은의 강”이란 뜻이죠.


00:37:15

한때 부에노스아이레스에는 영국의 최고급 백화점인 해로즈(HARRODS)백화점이 있었습니다. 1912년에 설립된 헤로즈백화점은 아르헨티나의 화려한 과거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르헨티나와 미국의 1인당 국민소득의 차액이 불과 18%밖에 되지 않았던 그런 시절도 있었죠. 결론적으로 말해 아르헨티나와 같이 자원이 풍부한 나라도 금융위기가 반복되면 망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경우입니다.


아르헨티나는 금융위기를 여러 번 겪었습니다. 하지만 1989년의 위기는 과거의 것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죠.


당시 아르헨티나에서는 2월초였는데도 전례 없는 더운 날씨가 기승을 부렸습니다. 턱없이 부족했던 아르헨티나의 전력설비 때문에 정전되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하지만 정전사태는 사소한 문제에 불과했죠. 다른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금융파국은 몇 가지 단계를 거칩니다.


첫 번째 단계는 징수한 세금보다 정부의 지출이 과다한 경우입니다. 전쟁이 원인일 때가 많죠. 아르헨티나는 1970년대 내전과 1982년 포클랜드 제도를 둘러싼 영국과의 전쟁이 원인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1989년 결정적인 위기가 찾아오죠.


00:39:35

2월이 되자 물가가 10%나 상승했습니다. 불과 한 달 만의 일이었죠. 정부는 은행을 폐쇄하고 이자를 낮추는 등 환율폭락을 막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효과는 없었죠. 한 달 만에 아르헨티나의 화폐가치는 달러에 비해서 140%나 하락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아르헨티나정부가 공공부문의 적자해소에 실패했다는 이유로 세계은행은 대출을 동결했습니다. 세계은행에서 돈을 빌릴 수 없게 되자 아르헨티나 정부는 공채를 발행해 재정적자를 메우려했습니다. 하지만 투자자들은 인플레이션으로 몇 일 후면 휴지조각이 될 채권을 살 생각이 전혀 없었죠.


결국 아르헨티나 정부는 난관에 봉착하게 됩니다.


00:40:45

그해 4월 한 슈퍼마켓이 물건값을 30% 올리겠다고 하자 사람들은 분노했고 쇼핑카트를 부수기까지 했죠.

진열장은 텅 비었지만 가게주인들은 새 물건을 살 돈이 없었습니다.



“당시상황은 정말 끔찍했어요. 같은 물건인데 아침저녁이 달랐어요. 손해를 볼까봐 팔수도 없었죠. 적당한 가격에 팔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또 오르는 거예요. 하루에 서너 번 이상 가격이 올랐었죠.”


중앙은행의 외환보유고가 바닥나고 있다는 소문이 돌자 국공채 가격이 폭락했습니다. 외채도 빌릴 수 없고 누구도 채권을 사려하지 않자 절망에 빠진 아르헨티나 정부는 중앙은행을 통해 화폐를 더 많이 발행하기에 이릅니다. 하지만 효과가 없었죠.


00:41:42

4월 28일 금요일 마침내 아르헨티나의 국고가 바닥났습니다. 기자회견장에서 중앙은행 부총재는 “이것은 물리적인 문제입니다”라고 말했다죠? 즉 아르헨티나 조폐국에 종이가 떨어져서 더 이상 돈을 찍어낼 수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부총재는 월요일면 화폐가 발행 될 것이라고 장담했습니다. 하지만 화폐를 찍어 낼수록 돈의 가치는 하락했고 정부는 점점 액면가 높은 돈을 발행 할 수밖에 없었죠.


5월에는 커피한잔의 값이 일주일 만에 50% 올랐고 신발 세 켤레가 소 한 마리 가격과 맞먹기도 했습니다.


1989년 6월 아르헨티나의 물가상승률은 100%에 육박했습니다. 1년에 12,000%가 상승한 것이죠. 예를 들어 5월에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 식당에서 음식 값으로 10,000 아우스트랄(1985년 아르헨티나에서 통용되던 화폐의 단위)을 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럴 경우 6월에는 20,000 아우스트랄을 그 다음달에는 60,000 아우스트랄을 지불해야만 했죠. 이렇게 지폐를 양 손 가득 들고 나가야 저녁 한 끼를 해결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00:43:32

분노한 시민들은 이틀에 걸쳐 폭동을 일으켰고 굶주리다 못해 약탈을 자행했습니다. 매 끼를 스테이크와 와인을 곁들어 먹던 이들이 부엌에서 스프로 끼니를 때우거나 굶어야 했습니다.


하이퍼인플레이션(물가상승이 통제를 벗어난 격심한 인플레이션 상태) 때문에 가장 큰 피해를 본 사람들은

일당을 현금으로 받는 근로자들이었습니다. 매달 고정 급료를 받는 공무원들도 피해를 봤죠. 연금 수령자들과 투자금의 이자수입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채권 소유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특히 현금이 필요했던 중산층은 보석과 식기들까지 내다팔기 시작했는데 당시 골동품을 파는 가계들이 지금도 성업 중입니다. 경제학자 존 메이나드 케인즈(영국의 경제학자로 <케인즈경제학>이론을 창시함)는 채권소유자들의 안락사를 예언하면서 인플레이션이 로스차일드 가문과 같은 금융재벌들의 부를 잠식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인플레이션이 전 세계를 휩쓸던 1970년대에는 케인즈의 주장이 사실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채권황재는 물론 채권 소유자는 보란 듯이 소생했습니다. 채권시장이 부활하자 놀란 미국의 관리들은 방금 찍어낸 새 채권을 팔아 <구제금융>에 투입하기 위해 동분서주했습니다. 이 같은 채권황제의 부활은 채권투자자들의 수가 증가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600년 전 채권시장이 탄생했던 이탈리아로 다시 가 볼까요?


이탈리아는 유럽에서 노령화 속도가 가장 빠른 나라입니다. 노령화 사회에서는 채권과 같이 수익이 고정된 채권이 주로 거래됩니다. 그런데 인플레이션이 연금과 예금의 실제 가치를 떨어뜨릴 것이라는 걱정이 큽니다. 그러므로 인플레이션에 관대했던 중앙은행은 채권시장에 그 해결책을 내놓아야 합니다. 또한 정부가 금융위기로 파산한 은행들을 구제할 계획이라면 신중해야 합니다. 채권을 팔아 국고 재원을 확보할 생각이라면 말이죠.


현대 유럽에서는 르네상스시대 이탈리아처럼 정치권력과 금융시장 사이에 균형을 잘 유지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세상의 진정한 지배자는 “비스터본드”나 “채권시장”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정부에 돈을 빌려주는 것보다 특정주식에 투자하는 것을 선호하십니까? 과연 어느 쪽이 위험성은 낮으면서 수익성이 높을까요? 다음 편에서는 주식시장의 거품과 붕괴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우리는 왜 금융사(金融史)를 통해 교훈을 얻지 못하고 있는지 그 이유 또한 설명해 드리죠.


THE ASCENT OF MONEY  / 돈의 힘

HUMAN BONDAGE / 2부 지불약속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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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eeniru

KBS_인간의 땅_살아남은 자들_아프가니스탄



감독 : 강경란

이 프로그램의 연출자 강경란PD에 대한 조선일보 관련기사가 있어서 그대로 링크로 대신 한다.     바로가기

 "총 맞는 건 괜찮지만 참수는 무서워… 악몽 피하려는 본능으로 꿈도 안꿔요"
 전쟁 있는 곳에그가 있다강경란 분쟁지역 전문PD

중앙일보 관련기사

▲ 분쟁지역 전문 PD인 강경란씨/ 조선닷컴

▲ 분쟁지역 전문 PD인 강경란씨/ 조선닷컴


                              ▲ 분쟁지역 전문 PD인 강경란씨 / 조선닷컴


촬영감독 横田徹(Yokota toru)

2009년 6월 21일 KBS1을 통해
인간의 땅_살아남은 자들(아프가니스탄)편이 방송됐다.  일반 시청자들이야 프로그램 내용에 관심이 가기 마련이지만 필자와 같은 프로그램 기획자들은 해당 방송내용의 전후좌우의 이야기들에 관심이 가게 마련이다. *^^*

이 프로그램 보도자료를 보면서 가장 먼저 내눈에 들어온 것은 <촬영 : Yokota toru 강경란>이였다. 즉 이 프로그램의 촬영을 일본인 카메라 감독이 했다는 이야기다.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곧바로 Yokota toru를 검색해 보니 일본내에서도 유명한 사진작가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몇 권의 개인 사진집을 출판하기도 한 중견 사진작가로 주로 야쿠자와 전쟁지역 등의 이미지를 담고 있다.


그의 가장 최근사진은 아프가니스탄 미군 101공수여단과 제1보병사단의 협력으로 헬리콥터부대중심의 종군사진이 현재 한 출판사의 소개페이지를 통해 소개되고 있다.  사진보기

특히 이번 방송에서도 많은 내용이 소개되었지만 그는 특히 미군의 종군사진가로 아프가니스탄에서 오랫동안 활동한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현재 태국 방콕서 생활하며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정권의 통치시절과 정권의 붕괴 그리고 신정권까지 다양한 사진과 영상을 보유하고 있으며 그것을 사진집으로 발행하고 있다.

요코다 토오루(Yokota toru)
1971년생. 1997년부터 포토저널리스트로써 캄보디아 내전을 취재했으며 그 이후 태국 방콕을 거점으로 아시아, 유럽, 중동, 아프리카를 취재하고 있다. 사진과 기사를 일본 및 해외의 신문, 잡지등에 발표하고 있다.

* 해외부대의 일본군인
* Reboren Afghanistan  200-2002



.. *^^*
타이틀 유승훈
낯 익은 이름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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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eeniru
 
 
플레이버튼을 눌러 감상하시기 바랍니다.
 

* 다음 내레이션의 타임코드는 상기 영상과 차이가 있습니다.  참고만 하시기 바랍니다. *^^*


THE ASCENT OF MONEY  / 돈의 힘

Dreams of AVARICE / 1부 탐욕의 시작


이곳은 돈의 세계입니다. 금전 화폐 엽전 등 돈을 일컫는 말은 많습니다. 돈을 뭐라 부르던 돈에 울고 돈에 웃는 게 우리 인생입니다. 지난한해 뉴욕 월가와 런던 시티금융가의 큰손들이 많은 눈물을 흘렸었죠.


00:00:50:00

세계를 호령하던 큰손들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동안 사람들은 돈을 은행에 예금해야 할지 집 금고에 넣어둬야 할지 걱정 했습니다.


니알 퍼거슨 / 하버드대 경제학과 교수

2007년 여름에 시작된 금융위기,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미국에 국한된 서브프라임 모기지문제가 어떻게 해서 월가의 거대한 회사들을 부도로 몰아가고 대서양의 은행들을 국유화 시킬 정도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을까요?


전 세계 경제를 얼마나 초토화 시켰던지 이 프로그램의 제목을 <돈의 추락>으로 바꿔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부터 돈이 우리 삶에 깊숙하게 개입하게 된 과정을 저와 함께 살펴보시겠습니다.


00:01:45:00

오랜 세월 이어져 내려온 금융사의 뒷이야기입니다. 은행의 지원으로 르네상스운동이 전개되었고 채권시장의 움직임에 따라 전쟁의 승패가 바뀌었습니다. 주식시장을 기반으로 대영제국이 일어섰고 화폐가치의 붕괴가 프랑스 혁명을 초래했습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현대 런던에 이르기까지 돈의 번영은 곧 인간의 번영이었습니다. 하지만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금융사는 반복되는 위기의 역사였고 오늘날의 금융위기도 그 중 한 페이지에 불과 합니다.


00:02:38:00

출렁이는 부동산과 중국의 급속한 산업화까지 금융의 막대한 힘은 우리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알고 계십니까? 은행이 파산하거나 금융시장이 붕괴되고 주식시장이 폭락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서브프라임>과 <프라임대출>의 차이는 무엇인지, 돈의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만 이해가 쉬울 텐데요, 바로 이 점 때문에 <금융사>가 학술적인 가치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00:03:30:00

THE ASCENT OF MONEY  / 돈의 힘

Dreams of AVARICE / 1부 탐욕의 시작


금융위기라고는 하지만 세계금융계를 떠도는 돈의 양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올해(2008) 미국의 총통화공급 규모는 $8,700,000,000,000 (8조 7천억 달러)로 작년(2007)보다 12% 늘었습니다. 물론 그 돈 중 상당부분을 챙기는 몇몇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공황이후 가장 심각한 금융위기라고는 하지만 20세기 최고의 펀드매니저로 유명한 조지 소로스는 작년에 24억 달러를 벌었습니다. 미국 평균연봉의 4만 1천배에 이르는 금액입니다. 월가라면 잘했다라고 칭찬하겠죠?


돈이 없는 세상을 한번 상상해 볼까요? 약 500년 전 잉카제국에는 돈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습니다. 잉카인들은 귀금속을 미(美)적인 가치로만 생각했습니다. 금(金)은 해님의 딸, 은(銀)은 달림의 눈물이라고 불렀죠. 공산주의사회와 마찬가지로 훗날 잉카제국에서도 노동력은 가치의 단위였습니다. 그런데 1532년 잉카인들은 돈 때문에 바다를 건넌 한 유럽남자를 만나게 됐습니다.



프란시스코 피사로(잉카제국을 정복하고 페루의 수도인 리마를 건설함)

엘도라도의 전설을 따라 페루를 찾은 프란시스코 피사로와 스페인 정복자들이었습니다. 까하마르까(페루 북부 산악지대 까하마르까 주(州)의 수도로 잉카문명의 흔적이 발견된)전투에서 잉카군을 무찌른 스페인 정복자들이 본격적으로 금을 찾아 나섰습니다. 스페인 정복자들은 볼리비아에 속하는 뽀토시지방에서 큰 덕을 봤습니다. 부의 언덕이라 불리는 세로리꼬산을 발견한거죠. 해발 4,800가 넘는 산은 말 그대로 돈의 산이었습니다.


스페인통치 250년 동안 안데스 산맥광산에서 무려 62,000톤 이상의 은을 캐냈습니다. 잉카인들은 유럽인들이 왜 금과 은에 열광해 하는지 의아해 했습니다. 피사로와 그 동료들에게는 금속 이상이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죠. 금(金)과 은(銀)은 곧 돈이었습니다. 가치의 저장소, 계산의 단위, 휴대 할 수 있는 권력이었죠.


광산(鑛山)안이 으스스한데요. 스페인 통치자들이 강제 노동제를 운영함에 따라 원주민 장정들은 모두 이 광산에서 일해야 했습니다. 여덟 명 중 한명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는 말이 이해가 가는군요.


5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세로리꼬 광부들의 형편은 비슷합니다. 지금은 그나마 돈이라도 받지요. 과거에는 원주민을 학대하다시피 했습니다. 캐낸 은(銀)은 수은으로 정해한 뒤에 은괴 또는은전(銀錢)으로 만들어 유럽으로 보냈습니다. 탐욕에 빠진 스페인 왕가들은 그들이 꿈꾸던 이상으로 부유해 졌습니다.


하지만 뽀토시의 막대한 은으로도 스페인 제국의 경제적 정신적 몰락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이젠 피사로의 행운이 끝난 것일까요? 은의 가치를 하락 시킬 정도로 은을 지나치게 너무 많이 채취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은전은 더 이상 스페인을 더 이상 부유하게 해 주지 못했습니다. 똑같은 물건에 더 많은 가치가 매겨지면서 물가는 오르기만 했죠. 돈은 그 교환가치만큼만 값어치가 있다는 사실 몰랐던 것입니다.


00:08:45:00 (영국-대영박물관)

은전, 조개, 금괴, 은행권 그 무엇이되었던 간에 태초부터 오늘날까지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사람들이 그렇다고 믿기만 한다면 흙이 은전보다 값어치가 있을 수 있습니다. 4,000년 전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이 같은 점토판에다가 금융거래를 기록했습니다. 자 그럼 한번 볼까요. 어디보자. 바그다드에서 발견된 이 점토판에는 수확 때 채무자가 채권자에게 곡식 330되를 갚는다고 적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이 흥미롭습니다. 이 점토판의 주인에게는 보리 넉 되를 준다고 쓰여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점토판 주인에게도 곡식을 줬다는 사실입니다.



00:09:50:00

영국의 20파운드짜리 지폐를 살펴보면 눈에 익은 문구가 들어옵니다. <소비자의 요구 시 20파운드를 지불 할 것을 약속합니다.> 사실상 지폐는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고대 바빌론의 점토판과 마찬가지로 그저 지불 하겠다는 약속에 불과합니다. 미화 10달러짜리에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합니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는 신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건이나 노동을 제공하고 이 같은 종이뭉치를 받는다는 것은 미국 재무부장관이 과거 스페인이 지나치게 많은 은을 채취해 은의 가치를 하락시킨 것처럼 종이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믿는 것과 마찬가지죠. 어쨌든 현재 사람들은 종이화폐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돈에도 만족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여성은 하루에 수백억 달러를 만집니다. 실상은 만지는 것이 아니라 컴퓨터 화면으로 보는 것이죠. 외환딜러는 돈을 사고파는 일을 합니다. 하루에 3조 달러가 이 같은 형태로 시장을 오갑니다. 모두 신용만으로 가능합니다. 만질 수도 없는데 그저 믿을 뿐입니다.


바로 이런 점을 스페인 정복자들은 간과 한 것입니다. 돈이란 곧 믿음이란 사실을요. 화폐를 발행한 중앙은행에 대한 믿음, 수표를 발행한 은행에 대한 믿음, 돈은 금속이 아니라 믿음인 셈입니다. 종이나 은, 점토 또는 컴퓨터화면이든 받는이가 믿으면 그 뿐입니다.


00:12:00:00

돈은 상호신뢰체재에 근간을 이루며 큰 가능성을 열었습니다. 세계사를 다시 쓸 정도의 큰 가능성 말이죠. 오늘 빌려준 돈을 내일 혹은 모레 받을 수 있다는 확신. 영어로 신용이라는 뜻의 크레딧(Credit)은 라틴어 크레도(Credo) 즉 “나는 믿는다.”가 그 어원입니다.


신용이라는 개념이 없었다면 세계경제사는 지금처럼 발전하지 못했을 겁니다. 우리는 현대문명이 <대출>과 <차용>에 얼마나 의존적인지 모른 채 살고 있습니다. 물론 돈이 세상을 전부 움직이지는 않습니다. 사람들과 용역과 물건들도 있지요.  고대도시 바빌론도 그랬고 볼리비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예상과 달리 초기 대부업자들은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고마워 하기는 커녕 천대를 받았죠. 왜 그랬을까요?


00:13:30:00

서기 1200년경 이탈리아 북부지역으로 가보죠. 도시국가들이 서로 다투며 난립하던 곳입니다. 서로를 믿을 수 없는 위험한 시절이었죠. 로마제국이 남긴 유산중 하나는 단위가 커지면 계산이  복잡해지는 숫자체계입니다. 각기 다른 일곱 가지 주화가 유통되던 피사에서는 상인들을 중심으로 숫자정립이 필요성이 절실했습니다. 간단한 거래에도 주판이 필요했으니까요. 반면 동방지역인 이슬람제국과 중국 송나라의 경제활동은 훨씬 발달했습니다. 유럽은 근대적인 재무체계를 수입해야 했습니다.



이때 피사에서 레오나르드 피보나치(이탈리아의 수학자로 피보나치수열에 대한 연구로 유명함)같은 젊은 수학자가 탄생합니다. 피사출신 세관원의 아들로 그의 이름을 딴 <피보나치수열>로 유명하죠. 피보나치수열은 그의 저서 <계산의 책>이라고 하는 <리베르 아바치>에서 소개 된 동양수학사상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피보나치는 아라비아 숫자가 로마숫자보다 더 우월하다고 증명했는데 이를 위해 그가 예시한 예들은 상업과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로마시대부터 유럽인들은 간단한 셈조차 어려워했습니다. 하지만 아라비아 숫자를 쓰면 각종 계산을 쉽게 할 수 있습니다. 피보나치는 회계, 환전,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자계산에 새로운 계산법을 적용했습니다. 로마숫자로 백분율을 환산하는 것이 상상이나 되십니까? 하지만 피보나치의 <리베르 아바치>를 보면 무척 간단합니다. 이후 수학을 응용해서 돈을 벌기 시작했죠.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은 금융제도가 발전하기에 적합했습니다. 피보나치의 고향 피사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특히 동방과의 교류가 많았던 베네치아는 대부업의 실험장이 되었습니다. 베네치아는 문학사상 가장 악명을 떨쳤던 대부업자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베네치아의 상인>에 등장하는 <샤일록>의 고향이죠.


베네치아의 상인 - 영국의 극작가 셰익스피어의 희곡


“나를 도와주겠는가?”

“나를 기쁘게 해 줄 텐가?”


샤일록 : “답을 주시게”


샤일록은  베사니오의 친구이자 상인인 안토니오가 보증을 서야만 돈을 빌려주겠다고 말합니다.


샤일록 : “3,000 두캇에 석 달 기한으로, 단 안토니오가 보증을 서야 하네.”

(Ducat :12세기부터 1차 세계대전까지 유럽에서 국제화폐로 사용했던 금화)


“어째서“


샤일록 : “안토니오는 좋은 사람이지”



여기서 “좋은사람”이라는 뜻은 베사니오에게 빌려준 돈만큼 값어치가 있다는 즉 신용이 있다는 뜻이죠.


“안토니오에 대해 나쁜 평판이라도 들었소?”

샤일록 : “아니요.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안토니아가 신용이 있다는 예기요.”

샤일록 : “3,000두캇 ,이 채권은 받아도 되겠어.”



어떤 대출에든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배가 침몰 할 수도 있죠. 비록 짧은 항해일지라도 대부업자는 그 위험에 대해 보상을 받아야 합니다. 그 보상을 우리는 <이자>라고 부르죠. 베네치아에서 해외무역은 이 같은 금전거래 없이는 불가능했습니다.  또한 오늘날까지 국제무역의 근간을 이루고 있죠.



그런데 왜 샤일록은 나쁜 인간으로 그려졌을까요? 왜 돈 대신 한 점의 <살> 즉 안토니오의 죽음을 요구했던 것일까요? 어째서 셰익스피어는 이러한 비정한 대금업자를 등장시켜서 악명 높은 금융가의 전례를 남겼을까요? 그 해답은 샤일록이 유대인이라는데 있습니다. 베네치아에 2주 이상 머무는 유대인들은 등에 커다란 원을 그리거나 노란 모자를 써야 했습니다. 그리고 <게토 누오보:Ghetto nuovo>라고 하는 특정지역에 갖혀 살았습니다.


이곳은 베네치아의 유대인 거주지역입니다. 비록 천대받기는 했지만 베네치아에서 유대인의 존재는 용인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기독교인들이 하지 않는 서비스를 제공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대금업이었죠. 피보나치가 이자를 계산해 냈을지는 몰라도 그 이자를 거둬들인 사람은 샤일록이었습니다.


00:20:00:00

이 건물에서 베네치아 유대인들은 돈놀이를 했습니다. 작은 탁자를 놓고 의자에 앉아서 일을 했죠. 영어로 은행 "Bank"의 어원은 바로 이 의자를 뜻하는 이탈리어 방코(Banco)에서 유래됐습니다. 상인들이 왜 이 곳 유대인들까지 돈을 빌리러 왔을까요? 이자를 받는 것이 기독교계 상인들에게는 죄악이었기 때문입니다.


00:20:30:00 피렌체 대성당

고리대금에 대한 중세 교회의 엄격한 제한은 유럽의 금융발달을 가로막았습니다. 아니 지옥에 간다는데 어떤 상인이 대금에 손을 대겠습니까? 지옥에서의 영원한 속죄, 피렌체대성당 돔에 그려진 이 그림은 조르지오 바싸리와 페데리코 주카리의 공동작입니다.


그 아래 부분은 도미니코 데 미켈리노가 단테 신곡의 한 장면을 성당 벽화에 담아냈습니다. 단테에 따르면 제 7지옥에는 고리대금업자를 위한 자리가 따로 있다고 합니다.


00:21:20:00

고리대금업자가 지옥에 떨어지면 목에 지갑을 걸고 영원히 고문을 받게 됩니다. 이자를 받는 것은 유대인들에게도 금기사항입니다. 구약 신명기 23장에는 “형제에게 이자를 받으면 안 된다.”라고 나와 있지만 남이라면 얘기가 다릅니다. 같은 유대인들끼리는 안 되지만 기독교인들에게 빌려주는 것은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고리대금 서비스를 제공한 대가로 유대인들은 사회로부터 소외를 받았습니다. <게토 누오보:Ghetto nuovo>라는 지역에 갖혀 지냈고 유대인하면 돈이라는 고정관념도 수 백 년 동안 사라지지 않았죠. 하지만 대금업은 유대인들에게 허용된 유일한 경제활동이었습니다.


샤일록은 결국 좌절합니다. 법원판결은 1파운드의 살점에 대한 소유권은 인정하되 안토니오를 죽이는 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유대인 샤일록에게 살인미수라는 죄목으로 재산몰수와 사형선고가 내려집니다. 개종을 함으로써 겨우 살아남았죠. 알고보면 상당한 위험한 직업이죠. <베네치아의 상인>은 경제학과 유대인혐오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그런데 그토록 멸시하는 유대인의 돈을 채무자들은 성실히 갚았을까요? 샤일록의 동료들이 같은 말로를 겪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늘날에도 원시적인 형태의 대부업을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현대판 샤일록도 쉽게 볼 수 있죠.              

00:23:38:00

스코틀랜드 글래스코 / 셰틀스톤

아! 이곳은 스코틀랜드에 위치한 셰틀스톤입니다. 철재 건축양식으로 서구에서 가장 험한 동네 중 한곳이죠. 이곳의 남성 평균 수명은 예순넷으로 방글라데시의 남성 평균수명보다도 조금 더 낮습니다. 주민들은 대부분 연금을 타기 전에 사망을 한다고 하는데요. 그런데 과연 이곳까지 와서 돈놀이를 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또 모르는 일이죠.


그 주인공은 바로 고리대금업자입니다. 그들에게 담보로 연금카드를 주면 돈을 빌려주죠. 연금이 나오면 그 카드로 우체국에 가서 돈을 받아 이자를 더해 갚는 것입니다. 샤일록의 영업구조와 똑같습니다. 현재 스코틀랜드의 고리대금업은 성행중입니다.


글래스코의 고리대금업자의 장부 중 일부입니다. 무척 재미가 있는데요. 10파운드를 빌려주면 주말에 12.5파운드를 돌려받는다. 일주일동안에 이율이 25%인 셈이네요. 연 이율로는 무려 1,100만%에 이릅니다.


00:25:18:00

하루 생활비로 5.9파운드를 쓰는 사람이 무슨 수로 그 정도의 이자를 낼 수 있을까요? 빚을 모두 갚을 수나 있을까요? 그러나 이곳 글래스코에서는 채무불이행이 불가능합니다. 고리대금업자에게 돈을 갚지 못해서 상해를 입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채무자가 돈을 갚지 않으면 손해가 크기 때문에 대부업자는 탐욕스럽고 무자비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르네상스시대 이탈리아에서부터 20세기 스코틀랜드에 이르기까지 고리대금업자들은 천대를 받았습니다. 금융서비스를 제공하는 대신에 사회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대가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대부업자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요? 관대해도 돈을 벌지 못하고, 너무 비정하게 대해도 채무자들은 결국 빚을 갚지 못 할 테니 말이죠. 정답은 덩치를 키워 강해지는 것이었습니다. 드디어 은행을 만들 때가 온 것입니다.


00:27:00:00

15세기 이탈리아, 신용대부의 핵심기능을 해 온 게토 누오보(Ghetto nuovo)지역에 합법적인 은행이 생겼습니다. 이와 함께 한 가문이 부흥하게 됩니다. 바로 메디치가(家)(르네상스시대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명가(名家)로 동방무역과 금융업으로 번성함)입니다. 메디치가의 번성과 함께 신용의 시대가 도래 합니다. 대부업은 과거와 달리 영광스러운 일이자 새로운 권력의 수단이 되었습니다. 메디치가문의 권세는 피렌체 곳곳에 유산으로 남아있습니다. 약 400년 동안 메디치가의 두 명의 딸들이 왕실로 시집을 갔고 아들 셋은 교황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마키아벨리(르네상스시대 이탈리아의 역사학자이자 정치이론가로 <군주론>의 저자)가 메디치가의 역사를 기록한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메디치가는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미켈란젤로부터 갈릴레오까지 메디치가가 르네상스시대 전체를 후원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00:28:00:00

이곳 <우피치미술관>에는 메디치가 소유의의 미술품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예술품들이죠. 과연 메디치가가 무슨 돈으로 이 예술품들을 사 들였을까? 우리들이 간과하기 쉬운 부분입니다. 메디치가는 “깜비오”라는 환전업 조합가운데 가장 운이 좋았던 가문이었습니다. 특히 의자에 앉아서 일을 했기 때문에 반치리에 혹은 다블리에리로 불렸지요. 양모조합거리인 바로 이곳 비아델 아르떼  델라라나에 최초의 메디치은행이 있습니다.



00:29:00:00

1930년대 이전 만해도 메디치가는 동네 불량배에 불과했습니다. 믿을만한 금융서비스가 아닌 저질 폭력으로 유명했죠. 피렌체에서 각종 범죄를 저지른 벌로 17년 동안 메디치가의 사람 5명이 사형을 당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지오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양모조합 거리에서 소규모 사업을 이끌던 메디치가를 이탈리아 피렌체의 명가로 성장시킨 인물)가 등장했습니다. 그는 메디치가의 영업을 합법화하는데 힘썼습니다. 결국 고리대금방지법을 피할 수 있는 독창적인 회계법으로 그 꿈을 이루게 되죠.


메디치은행의 장부를 보면 대외무역거래에서 상업어음의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당시 교회는 대출이자를 받는 것을 금지 했습니다. 하지만 약삭빠른 상인이라면 무역거래에 필요한 환전서비스를 놓치지 않았겠죠. 이자가 없으니 죄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환전의 대가로 적은 수수료를 받았을 뿐이었으니까요. 가불을 받을 경우 그 기간만큼 수수료가 붙었습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메디치은행에 돈을 맡긴 예금자들에게도 그에 따른 보상이 주어졌습니다. 이자가 드러나지 않는 형태로 <신용>을 사고팔았죠. 고리대금업이 은행업으로 진화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지오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가 쓴 <리브로 세그레토>에는 메디치은행의 성공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메디치은행의 비결은 규모보다 다양화를 추구한데 있죠. 이전의 이탈리아 은행들은 개별사업체이어서 단 한건의 불량 채권으로도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메디치은행은 조합 형태로 운영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 분권체재가 엄청난 수익의 비밀이었습니다.


메디치은행은 지오반니의 통솔아래 피렌체에서 베네치아를 거쳐 로마에까지 영업망을 넓혀 나아갔습니다. 규모 확장과 분산을 통해서 대출에 따른 위험을 줄일 수 있었고 이는 곧 채무자의 비용을 낮추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고리대금업자와 은행, 샤일록과 메디치가의 차이였습니다.


00:31:55:00

세금신고용으로 작성한 자산목록이 끝이 없는데요. 한번 보겠습니다. 총 91,089플로린화(Florin:13세기 피렌체에서 통용되던 금화)로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금액이었죠.


1429년 지오반니는 후계자들에게 자신이 만든 금융기준을 지키라는 당부를 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지오반니의 장례식은 은행업을 떳떳한 장사, 게다가 돈이 남는 장사로 만든 사람에게 경의를 표하는 자리였습니다. 그의 아들 코시모를 통해 부의 축적은 권력의 축적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습니다. 부친이 사망한지 20년 후 코시모 데 메디치는 피렌체의 군주나 다름없었습니다.


교황은 말했습니다.


“정치는 코시모의 집에서 이루어진다. 그가 선택하는 이가 관직을 맡고 법도 전쟁도 평화도 모두 그가 결정한다. 우리가 부르지 않을 뿐, 그가 왕이다.”


00:33:15:00

보티첼리의 이 작품(메달을 들고 있는 청년)은 젊음과 아름다움을 표현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사실은 죽은 코시모 데 메디치에게 바친 작품이죠. 메달을 자세히 보면 이탈리아어로 나라의 아버지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150년 만에 메디치가는 뒷골목 불량배에서 유럽 금융계의 큰 손으로 탈바꿈했습니다.


<동방박사의 경배>(보티첼리 1476)라는 이 작품은 메디치가가 이룩한 금융혁신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림에 나오는 세 동방박사의 실체는 예수의 발을 닦는 코시모와 그의 아들 피에로 그리고 지오반니입니다. 왼쪽에 칼을 든 젊은이는 로렌죠고요. 메디치가에 선사하기위해 은행조합에서 주문한 그림이었습니다. 그림제목을 “메디치가의 경배”로 바꾸는 것이 낳을 뻔했죠. 지옥으로 떨어질 운명의 은행가들이 하느님과 가장 가까워진 셈이죠.


00:34:38:00

돈의 힘을 가장 잘 표현한 대목이 아닐까요? 결국 메디치가에 의해서 현대 금융업이 탄생했다고 봐야 하겠지요.  돈으로 정치권력을 거머쥔 세력은 메디치가가 처음이었습니다. 금융의 세계는 클수록 좋다는 원칙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규모를 키우고 사업을 다양화 시켜서 위험을 분산시켰습니다. 대출뿐만 아니라 외환업무에도 집중함으로서 불량채권을 줄일 수가 있었던 것이죠. 이 모두가 코시모의 가족들에게는 훌륭한 사업모델이었습니다. 그러한 메디치가에게도 불사신은 아니었습니다. 귀족들에게 너무 많은 돈을 빌려줬다가 큰 손해를 입기도 했죠. 귀족들은 돈을 갚지도 않고 테연한 얼굴로 돈을 받으러 온 은행직원들을 쫒아냈습니다.


00:35:40:00

어느 은행이던 불량채권은 골칫거리입니다.


얼마동안 현대 은행들은 이 해묵은 문제를 해결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자신들이 메디치가의 사람들보다 똑똑하다고 믿었겠죠.


미국 테네시주 멤피스

피렌체의 지구 반대쪽 도시, 테네시주 멤피스입니다.  세계 경제의 판도는 르네상스 때와는 달리 변했습니다.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현대금융이 미국으로 건너오면서 크게 달라진 것입니다. 미국은 채무를 발판으로 성장한 나라입니다. 메디치 은행이 부유층을 상대한 반면에 미국은행들은 누구에게나 돈을 빌려줍니다. 멤피스는 파란 스웨이드 신발 립 바비큐 구이 그리고 파산자들로 유명합니다. 멤피스의 사람들은 빚을 갚느라고 허덕입니다.


[FAMILY DOLLAR] 쇼핑몰 이름이 아주 노골적이네요. 식료품 가격은 저렴합니다. 저 소득자에 대한 세금감면을 알려주는 세무사가 있습니다. 차량 소유권을 담보로 돈을 빌릴 수도 있다는 군요. [PAYDAY ADVANCE] 급여를 담보로 돈을 빌릴 수 있는 가게가 있고, 백화점만한 전당포도 있습니다.


전당포에 맡길만한 것이 없다면 여기 GLB플라즈마에서 25달러씩 받고 피를 팔면 되는데요. “피를 빨아먹는다.”는 말이 있는데 그 말이 사실이군요. 파산자를 상대로 먹고사는 경제라니 그저 놀랍습니다.


00:38:10:00

한편으로 스코틀랜드 글래스코의 동쪽 끝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고리대금업자들이 돈 대신 살을 떼어가는 세계와는 천지차이입니다. 이곳에는 빚을 갚지 못하는 사람들이 넘쳐나는데도 불구하고 대부업으로 돈을 버는 요령을 터득한 것 같습니다.


이 친구는 리치입니다. 채무자의 빚 대신 차를 회수하는 일을 하고 있죠.


* 리치

“총을 잡고서는 총에 탄환을 넣는 모습이 보였어요. 총대로 한 대 얻어맞고, 바로 여기요, 죽는 줄 알았습니다. 갑자기 채무자가 ‘트럭을 내놓던가, 목숨을 내놓던가.’하고 소리를 외치더군요.”


* 니알 퍼거슨

“아 이렇게 들으니 영화의 한 장면 같군요.”

“저도 직업을 바꿔야 겠어요.”


*리치

“긴장감이 넘치죠.”


파산의 도시에서 차를 회수당하는 일을 흔한 일입니다.


자동차회수연합은 매주 자동차 500대 가량을 되팝니다. 자동차는 경매로 팔리고 새 주인 역시 대출이자가 밀리면 그 차는 회수되어서 재활용됩니다. 멤피스지역의 이 같은 일들은 다른 지역의 채권 회수자들이 하는 일과 비슷합니다. 규모가 엄청나다는 것 말고 다른 점을 찾는다면 불량채권의 회수와 담보물의 재판매가 모두 쉽게 이뤄진다는 점입니다. 이곳 주민들은 빚지는 것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자본주의경제가 손쉬운 파산의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 신기할 따름입니다.


집안에 남는 물건 없이 차까지 회수당하고 나면 파산전문 변호사에게 도움을 받게 됩니다. 작년(2007년) 한 해 동안 테네시 주민 중 13,000여명이 파산신청을 했습니다,


“그럴 경우 생각지 않게 월납입금이 오르게 됩니다.”


파산자들은 매주 변호사와 만나서 채무이행계획을 세웁니다.


* 니알 퍼거슨

“이 경우에는 주택융자금이 있네요.” “차 할부금, 차가 두 대군요” “다른 채무항목은 없는 것 같은데요”


* 스테픈슨 변호사

“사실은 차가 세대입니다.” “이웃주민 소유의 차량인데 그것을 담보로 잡혔군요.”


* 니알 퍼거슨

“아. 자세히 좀 말씀 해주세요. 채무금액이 얼마고 지금 빚을 어느 정도 갚은 것이죠?”


* 스테픈슨 변호사

“총 채무액이 241달러 11센트였는데 107달러로 줄었군요.”


* 니알 퍼거슨

“월부금을 반으로 줄였네요.”


00:42:10:00

1996년에서 2006년까지 미국에서는 매년100만 건에서 200만 건의 파산신청이 접수됐습니다. 대부분 돈을 갚는 대신에 파산을 선택한 것이죠. 중세 이탈리아와 영국에서 파산은 경제적으로 무척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선 좀 다른 것 같군요.


미국 자본주의의 특징은 빚을 졌다하더라도 다시 시작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21세기 미국에는 19세기 영국처럼 빚을 지면 끌려가는 채무가 감옥도 없습니다. 1898년부터 모든 국민에게 파산법 7장과 13장에 따라 채무청산과 개인회생 신청이 보장됐기 때문이죠.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자연적으로 부여되는 <천부인권>에 <파산권>도 추가된 셈입니다.


00:43:20:00

미국의 법은 기업가를 위해 존재합니다. 새로운 사업이 가능하게끔 말이죠. 한두 번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한 번의 실패 때문에 좌절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는 것이죠. 오늘의 파산자가 내일의 억만장자가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미국에서 성공한 인물들을 살펴보면 초기 실패를 경험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소설가 <마크 트웨인>(톰소여의 모험, 왕자와 거지 등을 집필) 코미디언 <버스터 키튼>(찰리 채플린과 함께 미국 무성영화 시대를 대표하는 영화배우), 포드 자동차사장으로 유명한 <헨리포드>도 그 중 한명입니다. 이들의 성공은 실패 후 재기의 기회가 주워졌기에 가능했습니다.


은행입장에서는 대출가운데 일부가 연체됐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파산법 13장에 따르면 채무를 없애는 것이 아니고 채무이행계획을 다시 세우는 것뿐이니까요.


00:44:40:00

셰익스피어의 안토니오처럼 대부업자를 불쌍한 채무자의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 취급해서는 곤란합니다. 대출은 경제성장의 기초입니다. 하지만 은행의 출현이 가능해야 고리대금업에서 한 단계 올라갈 수 있습니다.


채무자들이 정상적으로 대출받을 수 있을 때 비로써 고리대금의 횡포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투자자도 돈을 믿고 맡길 은행이 있어야만 자신의 지갑을 엽니다. 여시 잠깐만요. 은행이 해결책이라면 지난해 왜 다들 파산신청을 했으며 왜 금융위기가 터졌을까요?


멤피스의 불량채권이 세계적인 금융위기를 야기한 배경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은행의 주택담보 대출이 증권의 형태로 바뀌어 무분별한 투자자들 사이에서 거래되면서 은행과 채무자의 정상적인 관계가 깨졌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는 은행업이 아주 간단했습니다. <3,6,3의 법칙> 즉 예금이자는 3% 대출이자는 6%, 오후 3시에는 골프 치러간다는 뜻인데요. 요즘 들어서 금융업이 지나치게 복잡해졌습니다. 연이은 금융혁신으로 멤피스같이 가난한 동네의 가정에서 받은 주택담보대출을 CDO 부채담보부증권 (Collateralized Debt Obligation) 같이 겉으로는 그럴 듯 해 보이는 투자 상품으로 바꿔버렸습니다. 납을 금으로 만들고 쓰레기를 우량 채권으로 만드는 금융 연금술이 가능했던 것은 은행과 함께 현대 금융 양대 축을 이루는 채권시장이 급성장했기 때문입니다.


00:47:00:00

다음 편에서는 빌 그로스(채권펀드사 핌코의 회장)에게 채권이야기를 직접 듣기로 하겠습니다.



THE ASCENT OF MONEY  / 돈의 힘

Dreams of AVARICE / 1부 탐욕의 시작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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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eeniru

제 6회 EBS 국제 다큐 영화제(EIDF) 국내 다큐멘터리 사전 제작 지원작 공모


    1. 주최
  • EIDF, 방송콘텐츠진흥재단(BCPF)

    2. 공모분야
  • 시사, 휴먼, 환경 등을 주제로 한 60분물 이상의 HD급 다큐멘터리
    (HD 6mm 포함, 기존 작품을 재구성한 작품은 제외)

    3. 지원자격
  • 만 19세 이상의 대한민국 국민(단, 기존 작품이 있는 자 우대)

    4. 지원규모
  • 총 3,000만원(1편 3,000만원 혹은 2편 각 1,500만원씩)

    5. 지원방법 : 선정된 작품에 대해 3회 분할 지급
  • ○ 1차 지급 (40%) : 제작 착수 및 제작지원 계약 체결 시
  • ○ 2차 지급 (30%) : 중간 제작실사 완료 시
  • ○ 3차 지급 (30%) : 완성작 제출 및 심사 완료 시
  • ※ 완성작 심사를 통과하지 못할 경우, 잔여 지원금 30%는 취소됨
  • ※ 제작지원금 사용의 허위 사실이 드러날 경우, 지원금 전액 환수

    6. 일정
  • 가. 6월 15일 - 30일 접수
  • 나. 1차 발표 : 7월 말
  • 다. 2차 심사 : 제 6회 EIDF 기간 중 공개 경쟁 심사(2009. 9. 22(예정))
  • 라. 최종 발표 : 제 6회 EIDF 시상식(2009. 9. 27)
  • 마. 제작 중간 보고 : 2010. 3. 30
  • 바. 제작 완료 : 2010. 6. 30
  • 사. 상영 : 제 7회 EIDF 기간 중(2010. 9월 말(예정))

    7. 유의사항
  • 가. 작품 완성 시 EIDF에서 첫 상영의 의무가 있음
  • 나. 완성작에 EIDF 및 방송콘텐츠진흥재단 지원작임을 명기함
  • 다. 약정 기간 내 작품을 완성하지 못할 경우 지원금을 반납해야 함
  • 라. 제작 기간은 1년을 기본으로 하되 2~3년의 장편일 경우는 별도 지원 가능하므로 지원서에 표기 요망
  • 마. 위 지원금은 세금이 포함된 금액으로 지급 시 세금을 공제한다.

    8. 제출서류
  • 가. 신청서 1부(양식 다운로드)
  • 나. 기획구성안 1부(양식 다운로드)
  • 다. 제작비 명세서 1부(양식 다운로드)
  • 라. 촬영 계획서(스케줄) 1부(가능할 시)
  • 마. 제작진 이력서 및 자기 소개서 1부
  • 바. 기존 작품 포트폴리오(DVD 등, 있는 경우에 한함)
  • 사. 신청자 신분증 사본 1부
  • ※ 필요한 경우 기타 자료 추가 가능

    9. 접수(마감 당일 18:00 도착분에 한함)
  • 아래 주소로 발송하거나, EIDF 사무국으로 직접 방문 제출.

  • 10. 제작 단계의 작품이나 장기 촬영이 필요한 작품의 경우는 위의 양식으로 제출하되 사무국으로 별도 문의 바람.

  • 11. 제출한 서류는 반환하지 않음.

  • 12. 신청서를 허위로 기재하였거나 서류미비 등 기타 사유로 심사가 불가능할 경우는 별도의 통보 없이 심사에서 제외될 수 있음.


  • EBS 국제다큐멘터리 페스티벌 사무국
  • 주소: 135-854 서울시 강남구 도곡2동 463
  • 전화: 02-526-2122~5 / 팩스: 02-526-2170
  • 이메일: eidf@ebs.co.kr
  • 홈페이지: http://www.eidf.org

    □ 사업계획 및 지원조건 위반 관련

  • ○ 사업계획서 상 허위사실이 확인될 경우, 당해 지원을 취소하고 향후 2년간 동 사업에 지원할 수 없음(기 지원금 일체 반환해야 함)
  • ○ 제작지원 결정 이후 제작을 중단 또는 포기한 사업자의 경우 차기 연도에 동 사업에 지원할 수 없음
  • ○ 저작권 분쟁이 발생할 경우 법원의 판결 또는 양자의 합의 등 객관적인 사실이 증명되지 않을 때에는 지원금 전액을 회수 할 수 있음

    □ 기타 조건
  • ○ 지원 대상 프로그램에는 “이 프로그램은 EIDF와 방송콘텐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제작한 것입니다”의 표기를 프로그램 전, 후 모두 자막(화면의 중앙에 표시)과 음성으로 3초이상 표시하여야 함
  • ○ 지원 대상 프로그램을 EIDF와 방송콘텐츠진흥재단이 비영리적 사업에 무상으로 지원하고자 할 경우, EIDF와 방송콘텐츠진흥재단은 당해 프로그램에 대한 저작권에 우선권이 있으며 대상 사업자는 이에 반드시 동의하여야 함
  • ○ 지원 대상 프로그램은 해외 판매가 가능하도록 ME 분리 및 클린 테이프로 제작하여야 함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Posted by beenir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