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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부 표해록 역주
카테고리 인문
지은이 최부 (고려대학교출판부,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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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해록 (한길그레이트북스 62)
카테고리 인문
지은이 최부 (한길사,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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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음 내용은 비니루가 작업한 최부의 표해록에 대한 다큐멘터리 기획안 내용 중 일부 입니다.

기획의도

① 조선의 “선비정신”을 오늘에 되살린다.

학행일치(學行一致), 박기후인(薄己厚人), 선공후사(先公後私), 억강부약(抑强扶弱), 외유내강(外柔內剛)등 이는 조선시대 선비정신을 의미하는 사자성어들이다.  철저히 유교사회였던 조선시대의 사회지도층으로 또 정치가들의 덕목으로써 근본으로 삼았던 이 “선비정신”은 궁극적으로 극기복례(克己復禮)(예로써 서로 경애하는 상호존중의 사회를 이룩함)를 통한 천인합일(天人合一) 즉 자연과 인간이 하나로 조화되는 경지, 다시 말해서 대동사회(大同社會)의 구현을 목표로 했다.


따라서 이 같은 선비정신을 습득하기 위해 조선의 많은 학자들은 교육과 체험으로 대대로 자랑스러운 선비가 되고자 했다.


그 가운데에는 풍랑으로 망망대해에서 조난을 당해 중국으로 표류하여 왜적으로 오인을 당하면서까지 힘든 여건에서도 결코 조선의 선비정신을 잃지 않고 굳건히 조선의 관리(官吏)로써, 喪人으로써의 예를 다했던 “최부”가 있었다.


본 프로그램은 금남 “최부”의 중국 표류기를 통해 힘들고 어려운 시간 속에서 그가 가졌던 조선선비의 정신과 한 나라의 관리로써의 당당함과 해박한 지식을 간접 경험해 봄으로써 <선비정신>을 오늘날에 되새겨 보고자 한다.


② 500년 전 중국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하는 <표해록>의 소개

조선선비 “최부”의 중국 표류에 관한 기록은 그가 남긴 <표해록>을 통해 매우 상세하게 기록되어 오늘에 전해지고 있다. 그 기록에는 500년 전 중국의 강남과 운하주변의 상세한 생활모습이 그대로 그려져 있다.


이 같은 이유로 최부의 “표해록”에 대한 관심은 우리나라의 학자뿐 아니라 중국의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도 매우 귀중한 자료로써 연구되어지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표해록>을 주제로 하는 국제심포지움이 매년 개최되는가 하면 중국과 일본, 미국 등지에서도 <표해록>이 출판되어 마르코 폴로의『동방견문록』일본 승려인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와 더불어 3대 여행기로써의 명성을 얻고 있다.


“표해록”에는 [미산만익비-眉山萬翼碑]라는 중국의 내륙운하를 건설하고 세운 산동 황가갑(黃家閘)의 비문내용이 적혀있다. 이 비는 현재 그 흔적이 없어 비문의 내용을 알 수 없는데 조선선비 최부가 쓴 “표해록”의 기록으로 비문의 내용을 이해하고 있다고 한다. 결국 이 기록이 중국대운하의 건설과 완성을 정확하게 알려주는 세계 유일한 자료라고 한다. 실로 <표해록>의 중요성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조선선비 최부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일깨운다.

조선 전기의 사대부 관료인 금남(錦南) 최부(崔溥·1454~1504)를 오늘날의 안목에서 보면 ‘조선의 마르코 폴로’라고 볼 수 있다. 조선시대 최고의 중국 여행기인 ‘표해록(漂海錄)’을 남겼기 때문이다.


1488년(성종 19년) 제주도를 배로 출발하여 흑산도로 오고 있던 최부 일행 42명은 중간에서 풍랑을 만났다. 14일간 죽을 고생을 하면서 표류하다가 마침내 도착한 곳이 명나라 절강(浙江)성의 임해(臨海)현 해변이었다. 이후로 최부 일행은 영파, 소흥을 거쳐 운하를 따라 항주, 소주를 둘러본 뒤 천진, 북경, 요동반도를 거쳐 6개월 만에 서울로 돌아온다. 그 여행기록을 정리한 것이 ‘표해록’이다.


지지당(知止堂) 송흠(宋欽·1459~1547)은 담양 소쇄원(瀟灑園) 일대를 중심으로 형성된 계산풍류(溪山風流)의 제1세대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최부의 5년 고향 후배가 송흠이다. 최부는 29세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송흠은 34세에 하였으니 벼슬로 따지면 10년 차이가 났다.


‘표해록’을 저술한 후 어느 날 최부는 고향인 나주에 내려와 있었다. 마침 송흠도 고향인 영광에 잠깐 내려올 일이 있었다. 송흠은 고향에 내려온 김에 평소 존경하던 선배인 최부를 찾아뵙기로 했다. 반갑게 송흠을 맞이한 최부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물었다.


“자네의 영광 집에서 여기(나주)까지 교통수단은 어떻게 왔는가?”, “서울에서 내려 올 때 타고 오던 말을 타고 왔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최부는 정색을 하고 송흠을 나무랐다.


‘서울에서 자네 고향집까지 말을 타고 오는 것은 공무이니까 당연하지만, 자네 고향집에서 내 집까지 오는 것은 사적인 일인데 왜 공무용 말을 타고 왔느냐’는 것이었다. 최부는 내가 서울에 올라가면 이 사실을 사헌부에 통고하겠다고 송흠에게 이른 다음에, 정말로 서울에 와서 이 사실을 고했다. 나중에 송흠이 처벌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송흠은 이 일을 계기로 대오 각성하여 후일 호남의 대학자가 되었다. 아꼈던 후배를 몰인정하다 싶을 정도로 몰아붙였던 최부. 그리고 이를 달게 받았던 송흠. 양반들의 이런 정신이 있었기 때문에 조선왕조 500년이 유지되었던 것이다. 이 정신이 바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라 하겠다. 

 

(위 사진 왼쪽으로부터)


1. 1769년 일본에서 「당토행정기(唐土行程記)」라는 제목으로 키요타(淸田君錦)가 번역·출간

2. 1979년 9월 금남 최부의 방손(傍孫)인 최기홍씨가 한글로 완역(完譯)하여 출판

3. 1965년 미국 컬럼비아대학 교수인 John Meskill 교수가 박사학위 논문으로 번역·출간

4. 1992년 중국 북경대학 교수인 갈진가(葛振家)가 본문의 표점(標点)과 주석을 붙여 간행


 

<표해록>은 어떤 책인가?

조선 성종 19년인 1488년, 제주에서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도망한 범죄인을 심판하는 관리)으로 봉직하던 한 선비는 부친상을 당해 고향 나주로 향하다 태풍을 만나 중국 절강지역으로 표류하게 된다.


망자에 대한 슬픔을 추스르기는 고사하고 낯선 땅에 도착한 43명의 선비 일행은 명나라 사람들로부터 왜구로 오인 받아 모진 고초를 당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은 뒤 다행히 누명을 벗고 6개월여 만에 귀국한다.


이 선비는 6개월이라는 짧은 기간동안 새롭게 접한 문물의 모습과 생각을 비상하게 기억하고 있다가 왕(성종)의 명을 받들어 3권의 '중조문견일기(中朝聞見日記)를 찬술해 바치는데 이후 이 내용을 그의 외손자인 유희춘이 활자본으로 간행하면서 <표해록>(漂海錄·)이란 이름을 붙였다.


② <표해록>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져 있는가?

이야기는 금남이 제주에 부임하게 된 경위를 약술한 뒤 부친상 소식을 접하고 성종 19년 윤 정월 초에 배를 띄우고 나가다 태풍을 만나는 것으로부터 시작돼 북경과 압록강을 지나 고국으로 들어오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소주 항주 서주 산해관 등 일행이 거친 거리는 육로로 8800여리가 된다. 그런 만큼 다른 문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명나라의 제도와 관습, 사회상, 인물평 등이 알토란같이 담겨 있다.


책에는 서주를 관통하는 운하의 개통시기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데 이 운하와 관련해 현재 문서로 남아 있는 글은 표해록이 유일하며 1500년대 전반부터 알려진 왜구의 창궐이 금남의 기록에 의하면 사실은 그전부터였다는 것도 추정할 수 있다.


귀국길에 명나라의 풍물을 두루 접했다고는 하나 유람이나 조공 목적이 아니었던 만큼 금남 일행의 여정이 가시밭길이었을 것은 뻔한 일이다. 하지만 자신들의 안위를 보장할 수 없는 와중에서도 중화사상의 진원지인 명나라의 강함과 유약함을 동시에 파악해 냈다.


교통의 요지로 상인들이 북적거리고 화려함을 자랑하던 호남과 복건 등 도회지의 모습에는 감탄을 금치 못했고 왜구를 막기 위한 해안의 굳건한 방어체제도 눈여겨보았다. 소흥부를 지나다가는 수차(水車)의 제조방법을 배워 귀국 후 농사를 지을 때 이용케 할 정도로 명대 문명을 높게 평가했다.


그러나 조선의 성리학자이며 유교 이상주의자인 금남에 눈에 비친 명나라 사회는 썩어 문드러진 것이었다.


③ <표해록>과 최부는 한국과 중국에서 어떻게 조명되는가?

<표해록>은 중국내에서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일본 승려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와 함께 3대 중국 기행문의 하나로 꼽히며 중국 여행기의 백미로 인정을 받고 있는 명작이다.


또한 명나라의 각종 정보를 담은 최부의 '표해록'은 중국 역사학계로부터 "중국에 대한 이웃나라의 가장 친절한 묘사"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극찬을 받고 있다.


성종의 명에 의해 조정에서 책을 펴낸 뒤 선조 때 재간행이 시도돼 임진왜란 이전에 우리나라에는 정주본, 나주본, 남원본 등 세 종류의 표해록 간본이 남아 있었으나 현재에는 하나도 없다. 반면 일본에는 임진왜란 때 약탈해 간 세 간본이 모두 존재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최부의 표해록을 통해 그의 표류기가 중국과 한국, 그리고 일본 등지에서 어떻게 조명되고 있으며 역사적 가치는 무엇인지 등의 내용을 중심으로 현지 취재를 통해 알아보는 기회를 가진다. 특히 중국내에서 일고 있는 최부의 표해록 신드롬에 대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밀착 취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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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eeniru